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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운동가 김호 선생(1884.5.25.~1968.1.5)의 서거일

기사승인 2018.01.05  09: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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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한인국민회의 가입으로 독립운동 시작

선생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본명은 정진(廷鎭), 호는 한사(漢槎), 자는 정옥(廷玉)이다. 서울 출신으로 배재학당·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다가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선생은 해방 후 귀국해서 정부 수립에 관여하고 과도입법의원 초대 관선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선생은 잠시 생업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달려가 중앙총회장 안창호를 만나 자신의 뜻을 피력하였다. 이에 안창호는 선생을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중서부지역의 특파위원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당시 대한인국민회는 국내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회원 1인당 인구세 1달러와 애국금, 독립금 재정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3월 17일부터 약 2개월동안 워싱턴주, 오레곤주, 아이다호, 네바다주, 와이오밍주, 콜로라도주, 뉴멕시코주, 애리조나주 등 9개주를 순행하며 동포를 심방하여 독립의연동맹회를 결성하는 한편, 10,000달러 이상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선생은 본격적인 민족운동 대열에 동참하였다.

그 후 독립 달성을 위해서 국제적 외교활동 역시 필요하다고 판단한 선생은 1919년 12월 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살음, 이범영, 이순기 등과 함께 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하였다. 노동사회개진당은 파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벌이던 조소앙을 후원하기 위해 조직된 독립운동 후원단체로서, 선생은 노동사회개진당의 선포문을 낭독하는 등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노동사회개진당은 동년 12월 중가주 다뉴바(Danuba)에서 당 대회를 소집하고 세계인민연맹 결성에 한국대표를 파송할 것을 결의하고 조소앙을 대표로 선정하여 1920년 2월 조소앙에게 신임장과 경비 2500달러를 송금하였다. 이외에도 1923년 4월 기관지 <동무>를 간행하고 구미위원부를 후원하였다.

한편, 선생은 독립운동의 재정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1920년 5월 중가주 리들리에서 김형순과 함께 ‘김형제 상회(Kim Brothers Company)’를 설립하였다. 김형제 상회는 처음에는 농산물 운송과 위탁판매업을 하는 한편, 복숭아 과수원과 화원 등을 경영하였다. 200여명의 한인노동자가 이 곳에서 일할 정도로 김형제상회의 사업은 성공하였으며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가장 큰 과일 농사를 지으며 연 100만불 이상의 수익을 올릴 정도로 번성하여 재미한인사회의 백만장자가 된 첫 세대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북미의 국민회는 광복군후원특별의연금 모금운동을 결의하고 하와이의 국민회에 통합을 논의하였다. 1941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는 독립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외교운동, 미국국방공작 원조, 재정방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설치 등 7개조의 사항을 결의하였고, 이 결의에 따라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주한인사회의 분산된 민족운동을 통일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였다.

또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태평양전쟁을 독립의 최적기로 포착하고 독립전쟁을 통한 한국독립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12월 22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장인 선생은 한인국방군 편성계획을 미국 육군사령부에 제출하고, 로스엔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를 창설하였다. 한인경위대는 캘리포니아 국방경위군(The California National Guard Armory in L.A.)의 소속으로 2개의 부대로 편성되었으며, 교관 쉐리(J. Sherry)의 지도로 매주 1차례씩 군사훈련을 받았다. 집행위원장인 선생은 1942년 삼일절 행사 때 한인경위대 관병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를 널리 알리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군사단체가 되었다. 동년 4월 캘리포니아주정부로부터 인가증을 얻은 한인경위대는 캘리포니아 국방경위군의 부속군대로 정식 편성되면서 한미 연합군사조직체로 인정받았다. 이때 한인경위대는 맹호휘장의 연대기(聯隊旗)를 받으면서 일명 맹호군(The Tiger Brigade)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장으로 1942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을 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한 일환으로 미국 당국과 협의하여 로스엔젤레스시청에 현기식(懸旗式, The Korean National flag Day)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국기가 1910년 망국 이후 32년 만에 외국관청에 게양되는 감격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과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9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출처 : 정상규의 독립운동가 앱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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