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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운동가 박찬익 선생(1884.1.2.~1949.3.9) 서거일

기사승인 2018.03.09  10:5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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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부를 이끌다

"광복 후 중국에 있는 동포사회를 안정시키고, 한인들의 귀국을 도와라"


1904년 당시 10대의 선생은 일본인 교사의 차별에 대들다가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고 그 이후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에 대한 반대투쟁에 참여하였습니다. 선생은 대종교라는 종교를 선택하여 민족정신을 발휘하였는데 대종교를 선택한 이유는 잃은 국가를 되살리자면 단군 신앙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한 뒤 선생은 서일 장군과 함께 '중광단'을 만들어 당시 중국으로 망명했던 수많은 동포들을 챙기고 지원하며 규합하는데 가장 큰 노력을 했습니다.

특히 1913년 선생이 '중광단'에서 필요한 무기 구입을 위해 중국과 벌인 교섭은 대단한 성과를 가져왔는데, 보병총 300정, 권총 10정, 수류탄 150발, 탄환 5,000발 등을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선생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중국어와 한국역사를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1915년 5월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대종교에 대해 ‘미신타파’를 내걸고 종교를 없애라 명령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의 근본 이유는 겉으로는 ‘미신’을 타파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단군 신앙을 짓밟아 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망을 부수려는 정책이 숨어 있었습니다.

박찬익 선생은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 창설과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 참가했는데 대한독립선언서는 국내의 ‘조선독립선언서’와는 다른 것으로 동포들에게 결사 항전하여 독립을 되찾자고 외친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4월 10일부터 12일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이를 운영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운 인물 중 한명이었고 . 4월 23일 서울 국민대회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조직될 때,  박은식, 신채호, 손정도, 조성환 등과 함께 18명의 평정관(評政官)이 되었습니다. 한성정부는 얼마 뒤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죠..

1921년 박찬익 선생은 상해로 다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식으로 발을 디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1921년 4월 경기도 대표로서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었고. 7월에는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뽑혀 정부의 외교임무를 전담하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외교업무의 대부분은 박찬익 선생과 관련이 있었고 가장 핵심적인 중국당국과의 교섭업무는 전부 선생의 몫이었습니다. 또한, 특정 독립운동가의 석방을 위한 교섭에 나선 인물도 선생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925년 10월 삼시협약 때문에 이강훈, 신갑수 독립운동가가 체포되었을 때 그들을 외교로 빼내온 사람이 선생이었습니다.

1929년이 되었습니다. 1929년 만주에서는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고 그 지부가 남경에 들어섰는데 당시 남경지부의 대표를 박찬익 선생이 맡았습니다. 이것은 외교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가 남경이었고 임시정부 외교통이었던 인물이 남경지부의 대표직을 맡은 것은 아주 치밀한 외교적 전략이었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선생은 1930년 중국국민당에 들어갔고 실제 중국국민당 국제부 선전과에서 근무를 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결점으로 생활을 시작합니다.

1932년 독립운동사의 두 거성인 이봉창, 윤봉길 선생의 의거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급하게 이동하면서, 박찬익 선생의 활동 내용도 달라졌습니다. 첫째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것이나, 독립운동가들을 정착시킬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중국 정부와의 교섭에 달려 있었기에 당시 중국국민당과 교섭을 위해 박찬익 선생을 주축으로 안공근, 엄항섭 선생 이렇게 세 사람이 큰 역할을 해냈습니다.  김구 선생이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면서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에 잠적해 있을 수 있던 것이나 정부가 항주에 터를 잡은 데에도 박찬익 선생의 외교에 큰 공이 있었습니다.

또한, 은주부(殷鑄夫), 주경란(朱慶瀾) 등 중국의 명사들이 김구 선생에게 특별 면회를 청했으며, 1933년 박찬익 선생은 김구 선생과 장개석 두 거두의 회담마저 성사시켰습니다. 이 회담을 통해 중국 국민당은 한인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에서 육성하기로 했으며, 이듬해에는 하남성 낙양에 있는 중국군관학교에 특설반을 마련하여 한인청년들을 초급장교로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박찬익 선생은 광복 전까지 항일운동 좌파 계열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시키는 일을 진행했고, 그러기 위해 중국 정부가 지원해주는 독립단체를 하나로 통일 시켜야했으며 이 단체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단일화 시킨다는 목표로 김구 선생과 박찬익 선생은 힘을 합쳤습니다. 여기서 박찬익 선생과 의열단장 김원봉 계열이 충돌이 일어났으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감화되어 의열단 포함 좌파 계열은 대부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광복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패망과 항복 소식을 들은 후 모두가 기뻐할 때 박찬익 선생은 남은 과제를 진행합니다. 환국 뒤 나라의 외교업무와 외교관들 양성, 그리고 동포사회를 안정적으로 꾸려가는 것, 그리고 중국에 망명한 동포사회와 이민1,2세대를 안정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947년 중국에서는 국공내전이 벌어졌고 선생은 만주지역에 있는 많은 한인들을 묶어 보병독립총대를 만들었습니다. 만 64세의 선생은 1948년 건강악화에도 불구하고,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만류하려고 급히 귀국을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죠. 외교의 전문가로 평생을 살았던 인물인데 얼마나 불안하고 신변의 위험노출이 심하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마지막까지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이 된 후에도 승인받지 못한 것이 자신의 역량이 부족했다며 자책하였고 괴로워했습니다. 1949년 2월 20일 선생은 조국을 그리워하고 미안해하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중국에서 벌인 독립운동은 중국 정부의 정책에 민감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대한 외교는 절대적인 분야였고 이 일선에 섰던 분이 박찬익 선생이었습니다. 만주에서도 그랬고, 중국 본토에서도 그랬습니다. 특히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를 맡으면서, 광복군 창설이나 좌우합작, 정부 요인과 가족의 생계 문제 해결,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끌어내는 데까지 그의 노력이 빠진 곳이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 정신과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제공 : 정상규의 독립운동가 앱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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