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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육십번째

기사승인 2018.05.20  20: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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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이 자연스런 시대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우리에 갇힌 우리들 - 수상한 강조

연고주의를 말하면서, 지연을 계기로 발생하는 ‘지역주의’를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한국이지만, 지리적으로 촌락이나 도시, 지역이 생기면서,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오다보면, 경제나 관습, 문화나 가치 등 삶의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동질성이 형성된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라는 한 권역의 삶이지만, 어떤 한 공간을 자세히 보면, 많은 공간-들로 이루어진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라도와 경상도가 다른 지역이 될 수도 있고 같은 지역이 될 수도 있으며, 한국과 일본이 다른 지역이 될 수도 있고 같은 지역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한국의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한국 내의 지역주의다. 이는 무엇보다, 영남과 호남의 나뉨과 함께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많이 다루어질 수는 없지만, 서울과 지방의 나뉨과 함께도 함께 말해져야 할 것이다.

60년대 이후 영호남의 국회의원 후보 진영들은 선거에서, 말 그대로, 지역 나뉨에 ‘착안’(着眼)하고 이를 ‘강조’하고 드러내면서 편을 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가 되어 우리가 우리를 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암시적으로 말한다. 우리와 남을 나누는 목적에서, 우선은, 수가 중요하다. 선거는 수다. 표의 수다.

국회의원 선거는 영호남에서 따로 같이 진행된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리는 우리다!’라고 해도, 같은 우리 사람들끼리 경쟁할 때는 별 ‘영양가’가 없게 된다. 같은 호남 후보들끼리 경쟁하는데, ‘나는 호남인이다!’라 하거나 ‘나도 호남인이다!’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그보다, 분화된 각종 연고들의 동원 속에 공천되는 것이 문제다. 공천 후엔 강한 우리의식 속에 ‘작대기만 꽂아도 살아나는’ 식의 당선확정이다. 그렇지만, 호남에서 ‘영남 당’이 약간은 ‘심상치 않다’고 생각될 땐, 호남 당은 ‘우리’를 필요한 만큼은 더 언급해야 할 수도 있다.

호남 당은 호남에서만, 영남 당은 영남에서만 당선된다면, 역시 숫자 많은 영남이 대선 표수나 국회의원 수의 확보에 유리하다. 일자리와 교육을 찾아, 사람들이 지방에서 수도권에 몰리면서, 수도권도 자주 영호남 대결의 연장선에 놓인다.

수와 ‘색깔’에서 약한 충청권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려다가, 결국은 이런 대결구도에 흡수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런 약자는 일종의 ‘은근한 강자’로서 캐스팅보트로 두 강자들을 좌우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내기도 한다. 수와 ‘색깔’에서 더 약한 강원권은 보통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은 꿈도 못 꿀 처지로 머문다.

물론, 이런 지역대결 구도에서는 지역이 정책을 앞선다. 그리하여 선거에서 정책의 내용보다, 사람의 능력보다 지역 이름, 당 이름의 형식을 더 본다. 내용을 표현하고 현실을 재현하는 ‘이름’ 내지 ‘겉’, 혹은 실(實)을 이기는 ‘명(名)’이 늘 문제다. 이들은 실상을 감추고 허상, 가상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함께, 이러한 기계적인 획일주의와 분열주의 혹은 ‘이름주의’ 속에 다양성이나 창의성은 물론, 실제의 화합이나 통합, 발전이 저해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지역주의에서도 결국, 같음과 다름의 다양한 관계들이 문제로 등장한다고 할 것이다. 지역주의는, 남들과 우리를 나누면서, 우리는 ‘같다고’ 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이런 나눔은 같고 다름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좋고 나쁨을 전제한다. 우리는 ‘같다’, ‘하나다’, ‘남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남-다르다고 하면서도 그 다른 점들을 남 앞에서 명료하게 표현하기가 어려울 때도 많다. 여기서 다름은 ‘좋은 다름’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우리는 그렇지만 남들은 그렇지 못함을 은근히 포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들의 잘못을 잘못 말했다가 ‘큰일’ 난다.

자꾸, 우리는 우리와 하나다 혹은 같다고 강조하고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고 강조하는 것이 어쩐지 수상하더라고 했다. 강조할 때는 수상할 때가 많은 법이다. 강조(强調, Be-ton-ung) 속에서는 어느 한 면만이 선택되어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면서, 다른 면들은 자동적으로 ‘약조’(弱調)되어 묻히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를, 우리가 잘 살기를 강조함이 종국에는 내가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숨은 목표로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우리’의 강조는 결국 ‘나’의 강조가 아닌가? 나의 강조를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를 가지고 강조한다. 당리나 사리의 사익을 챙기면서 늘 국민의 이익이라고 하듯이...

그래도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민초들은 그리 안다. 이런 앎이 문제다. 소크라테스(Sokrates, 기원전 470~399)는 ‘앎의 모름’과 ‘모름의 앎’을 말한다. ‘모르는 앎’이 문제다. 모르게 알게 함에 알게 모르게 빠짐이 문제다.

무엇이 앎 아닌 앎에 빠트릴까? 민초들은 무엇보다 말을 듣고 안다. 그런 말 혹은 앎은 - 무엇보다 - 다양한 미디어들이 알게 모르게 전하고 다양한 교육과 설교들이 알게 모르게 주입한다.

수상한 강조는 - 보통은 -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함이 더 효과적이다. 사실과 이성을 쉽게 뛰어넘는 속에서 ‘동질감의 원리’, ‘울컥의 원리’로 감정에 호소하기는 일종의 ‘얼렁뚱땅 건너뜀’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호소하며 강조할 때, 사실은 쉽게 왜곡되고 비켜간다. 나를 위하면서 남을 위한다 하고, 위를 위하면서 아래를 위함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다양한 종류의 의원들은 연구하고 배운다며 국민세금으로 자주 해외로 나가는데, ‘실은’ 대부분 관광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관광하고 즐기는 것을 연구, 벤치마킹이라고 거짓말하다가 자주 들킨다.

그리고 이런 ‘문제 있는 일’에, 반대로, ‘문제없는 일’에 해당하는 ‘이름’을 댄다. 혹은 연구와 관광을 섞어놓고 연구라는 이름만 댄다. 연구와 관광의 비중이 비슷한 것도 아니다. 관광이 시간과 관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배우자까지도 ‘임시 의원’으로 되어 그의 배우자처럼 대우를 받기도 한다. 이 모두가 일종의 ‘세월호’라 할 만하다.

졸려서, 딴 생각을 해서 책의 글이 안 들어올 때,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를 뜻하는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를 말하듯이, 이럴 땐 ‘이름은 이름대로 실제는 실제대로’를 뜻하는 ‘명자명실자실’(名自名實自實)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실제를 넘어설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이름’이 또 문제로 된다.

아니, 이름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이 이름을 대는 행동이 문제다. 하나의 사실에 이와 무관한 ‘예쁜 이름’을 만나게 하는 사람행동이 문제다. ‘연구와 관광을 섞어놓고 연구라고만 표현하는’ 이름전략은, 두 사람의 얼굴 사진을 섞어 이 사람으로도 저 사람으로도 보이게 하여, 대리시험을 치르는 전략과 같은 논리다. 공자의 ‘정명’(正名)이 또 생각난다. 약간은 다른 의미로지만...

합성 사진은 시험관에게는 수험자의 사진이라 말하고, 합격 후에는 실제 입학자의 사진이라 말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것도 일종의 중의법으로 전형적인 ‘얼렁뚱땅 건너뜀’의 논리라 할 것이다. 2장 7절에서 우리는 이런 중의법에 대하여 비교적 많이 생각했다.

‘이름주의’, ‘겉치레’, ‘얼렁뚱땅’, ‘중의법’, ‘수직주의’ 사이에서 소통이 잘 되는 것 같다. 결국, 힘과 지식 내지 이름의 문제가 아닌가?

서울에 모든 이권들이 몰려 있다. 서울에 살든 지방에 살든, 우리는 서울과 지방의 ‘너무 나뉨’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너무 나뉘어’ 있어, 지방의 주민들은 서울에서 누릴 수 있는 경제, 교육, 문화, 의료, 교통, 주거, 공원, 정치, 종교, 결혼, 연애, 등산, 음식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

물론, 지방이나 시골에서만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도 있다. 대체적으로 그 혜택은 그러나 양과 질에서 비교도 안 되는 격차를 보인다 할 것이다. 서울 안에서의 다양하고 극심한 양극화도 ‘너무 나뉘는’ 격차들을 잘 말해준다. 늦게나마 국토의 균형과 조화를 말하고 이를 조금씩 실천은 하고 있지만, 균형에 도달하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멀고 먼 길 같다.

같은 학교의 졸업을 생각해볼 때, 이 땅에서 대학동창의 끌어들이는 힘과 밀어내는 힘은 대단하다. 실은, 모든 대학이 그런 것이 아니라, 힘 있는 대학만이 그럴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묶어내는’ 단속(團束)이 이루어지지만, 대외적으로는 단속(斷續)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의 ‘합하는’ 힘은 결국 ‘나누는’ 힘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단속(斷續)은 ‘끊고 이음’을 의미한다기보다 ‘이음을 끊음’을 더 의미한다. 마치 단수(斷水)가 공급하던 수도 물 끊기를 의미하듯이... 같음 끌어들이기가 다름 밀어내기와 무관할 수 있다면, 나누며 함께하는 삶에 별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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