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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태일의 『한문화 산책』 - 간송미술관

기사승인 2018.06.04  07: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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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북구 골목에는 반년마다 공개하는 간송미술관이 있다. 흔히 미술애호가들이 ‘반년시계’라는 애칭으로 5월과 10월에 2주일 동안 공개하는 전시회를 손꼽아 기다린다.

 1971년 이래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줄을 선다. 국보급의 문화재들을 구경하기 위해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중에도 한평생 우리문화유산을 수집하는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 간송미술관의 주인인 전형필이란 분이다.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자' 간송 전형필, 자료제공=kbs화면캡쳐

 간송 전형필은 중추원 의원이자 종로거상인 소문난 갑부 전형기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느 부잣집 도령과는 달리 늘 검소하고 근면한 모습으로 자라났다. 그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스승 오세창의 권유로 문화재를 수집하게 된다.
 
 10만석의 재산을 상속받았으니 재력은 넉넉했다. 서화와 고서구입으로 시작하여 도자기, 조각품 등으로 확대되었다. 간송은 우리문화재가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을 그저 두고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고서적상점을 인수하고 골동품을 사들이는 데 몰두했다.

 1935년 일본인 골동품상 마에다는 명품청자를 ‘2만원에 사겠소!’하는 조선청년에게 질렸다고 한다.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고 쌀 한가마가 16원하던 시절이었으니 그 돈이 얼마나 거금인지 알만 하다.
 
 입이 딱 벌어질 만큼 거금을 주고 산 것은 하얀 꽃구름이 흐르는 옥빛 가득한 하늘을 수 십 마리의 학이 날개를 활짝 펴며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고려 상감청자 한 점이었다. 고려청자 기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이었다.
 
 이 청자를 탐냈던 많은 일본인 수집가들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 중에는 4만원에 사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간송은 ‘이 청자 매병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가져오면 언제든 원금에 드리겠다’고 했다.

 그보다 더 좋은 청자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좋은 문화재를 에누리 없이 거금을 선뜻 주었으며 그것도 주저 없이 사들인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일본인에게 놓친 문화재가 있으면 힘을 다해 다시 사오고야 말았다고 한다. 우리문화재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간송은 좋은 물건이면 파는 사람이 부른 가격의 몇 배의 돈을 자진해서 주었다. 국보급의 귀중품은 가격을 묻지 않고 그 물건에 합당한 충분한 가격을 지불했다. 반드시 제 값을 쳐 주었다는 것이다.
 
 간송이 최고의 문화재인 훈민정음을 구입한 것은 1924년이었다. 하루는 창밖으로 그의 눈에 옛 서적을 거간하는 이름난 골동품 상인이 어딘가 바쁘게 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사연을 물었다고 한다.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원본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책 주인이 1,000원을 부르기에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 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출판한 훈민정음원본이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이 책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총독부에 들어가면 한글말살에 혈안이 된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간송은 거간꾼에게 즉시 1만 1천원을 건네며 책 주인에게 만원을 지불하고 천원은 수고비로 받으라고 했다. 귀한 물건은 제값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광복 때까지 훈민정음이 있다는 사실을 밖으로 알리지 않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훈민정음을 가방에 넣어 서울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밤낮으로 훈민정음을 몸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또한 1914년을 전후해 일본에 정착한 영국인 변호사인 개스비라는 청년이 고려청자 등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며 그가 일본에 체재한 25년 동안 많은 도자기를 수집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도자기 감정가였기에 그의 도자기 컬렉션은 모두 우수한 국보급이었다.

 언젠가 개스비가 그의 도자기 컬렉션을 처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 바로 일본으로 갔다. 떠나기 전에 공주의 농장을 팔아 구입자금을 마련했다. 당시 기와집 50채에 해당한 거금 50만엔, 지금 돈으로는 수 십 억 원 쯤 되는 고액을 아낌없이 우리문화재 회수에 투자했다.

 그때 사들인 것들 중에 국보급으로는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와 ‘백자박선향로(보물 제238호)’가 있었다. 그 이외에도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 등이 있었다. 개스비도 조선의 명품이 조선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간송은 우리문화재가 일본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전 재산을 투입하면서까지 우리문화재를 지켰다. 만세에 귀감이 되는 훌륭한 업적이었다. 우리가 그를 칭송하는 이유이다.

제갈태일 한문화연구회장, 칼럼니스트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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