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정영훈 교수의 『조소앙의 단군민족주의와 삼균사상』 두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8.06.20  11:46:34

공유
default_news_ad2

지난 2018년 6월 2일 동국대 신공학관 대강당에서 “민족통일 과제와 단군”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단군학회 2018 (단기4351) 봄철 학술회의”에서 [조소앙의 단군민족주의와 삼균론]을 발표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영훈 교수의 발표 논문을8회에 걸쳐 연재코자 합니다.  /편집자 주/

 

 

단군민족주의자 조소앙 - 단군민족주의자로의 전환

필자는 조소앙의 삶과 정치노선은 단군민족주의와의 연관 속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그가 정립하여 제창한 삼균주의는 ‘단군민족주의’를 정치사상적으로 구체화시킨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이 점을, 조소앙이 단군민족주의자였다는 점과 그의 삼균주의가 단군민족주의의 영향 속에 성립하여 단군민족주의의 사상적 지향을 대변하였다는 점 등 두 차원에서 살피고자 한다. 곧, 조소앙이 단군민족주의적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고 스스로 단군민족주의를 보급하고자 애썼던 단군민족주의자였다는 점과, 그의 삼균사상은 단군민족주의가 발굴하고 전개한 자료와 인식들에 기초하고 있고 단군민족주의의 사상적 지향들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 등 두 측면이다.

먼저 조소앙이 단군민족주의 흐름과 만나 그 의식을 공유하였으며, 스스로 단군민족주의를 보급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는 점부터 살피기로 하자.

소앙이 단군민족주의를 만나 그를 공유하게 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첫 번째의 자료는 그가 일본 유학시절에 썼던 일지 [동유약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일지에서 특이한 대목은 년도를 적는 방식이 3번에 걸쳐 바뀌고 있는 대목이다. 이 일지는 그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던 1904년부터 1912년(26세)까지의 활동내역과 견문한 바와 일들을 적고 있는데, 매년 그 해의 첫 날의 일지에는 그 해를 일정한 연호와 구분방법을 이용하여 표시하고 있다. 그를 보면, 1904년부터 1910년까지는 ‘광무’와 ‘융희’ 등 대한제국의 공식 연호를 가지고 연도를 표시하고 있다. 이는 소앙이 대한제국의 황실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 왔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로 이해된다.
 
그런데, 1911년에는 “主後1911년, 공자탄강후 2461년, 단군개국 4244년, 대한개국 520년”이라 적고 있어 주목된다. ‘융희’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사정을 반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主後1911년’을 먼저 적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主’는 예수를 가리키며, 그가 ‘주후’(=서기)를 먼저 적은 것은 그가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교인이 된 것을 반영한다 하겠다. 또 ‘공자탄강’을 ‘단군개국’보다 먼저 쓴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그가 아직까지는 유교적 지식인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지 않았음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1912년 일지에서는 그 순서와 표현이 획기적으로 바뀐다. 곧 “단군개국4245년, 공자탄생2463년, 이조개국 521년, 야소탄생 1912년”으로 적고 있는 것이다. ‘단군개국’ 연호를 ‘공자탄생’보다 먼저 적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거니와, ‘주’로 지칭되던 예수를 그저 ‘야소’로만 표기하고 맨 끝 순서에 배치하고 있는 대목도 중요한 것 같다. 이는 그가 기독교에서 벗어난 것과, 유교적 지식인으로부터 단군민족주의자로 전환한 것을 보여주는 증표로 판단해도 될 것이다.   

이후 조소앙은 시종하여 ‘단군민족주의자’로 살았다 할 수 있다. 가령 그는 단군을 언제나 ‘국조’로, 우리민족을 ‘배달겨레’로 지칭하고 있었으며, 망명시절에는 개천절을 기리는 논설을 수건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우리 배달겨레는 단군께서 개천ㆍ건국하신 이래 동방에 있어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민족이라고 역설하였으며, 단군을 민족사의 기점이자 집단정체성의 연원으로 보는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단기연호를 적극 사용하였다. 
  
소앙이 기초하여 1917년(檀帝紀元4250년) 17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공동명의로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은 ‘단기’를 이용하여 발표일자를 적시한 최초의 민족적 선언문이었다 할 수 있다. [선언]에서는 “我韓은 無始이래로 韓人의 韓이오 非韓人의 韓이 아니라” 선언한 후,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我국민동지’에게 묵시적으로 선위한 것이니, ‘吾人同志’(=민족운동가들)가 대동단결하여 “이천만 生靈과 삼천리 舊疆과 사천년의 주권”을 상속해서, 민족의지를 대표하는 통일적 최고기관을 설립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선언]에서 “아한은 무시이래로 한인의 한”이라 규정한 것은, 국가의 주권이 민족에게 있고 국가는 민족을 위한 기관이라는 논리를 전개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신채호 이래 한국민족주의 이론가들에게 공통적인 국가관이라 할 수 있다.

소앙이 기초한 또 하나의 민족선언서인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1919년초)에서도 단기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이 선언에서는 훨씬 적극적으로 단군민족주의적 민족의식이 표출된다. [선언서]에서는 우리민족을 ‘단군대황조’의 ‘이천만 적자’이자 ‘형제자매’로 일컬으면서, ‘단군대황조’께서 천상의 상제(=환인)의 좌우에 있으면서 우리민족을 원호하고 있다고 격려하고 있다. 단군은 말하자면 민족적 조상신으로서, 민족을 보살펴주고 그 웅비와 독립의 기운을 지켜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선언서]의 주요 부분을 아래에 인용해본다.

“咨我 同心同德인 이천만 형제자매아.  我 檀君大皇祖께서 상제에 좌우하사 우리의 기운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助하는도다.  정의는 무적의 검이니 此로써 逆天의 魔와 盜國의 賊을 一手屠決하라.  此로써 오천년 祖宗의 광휘를 현양할지며, 차로써 이천만 赤子의 운명을 개척할지니, 起하라 독립군아, 齊하라 독립군아.”

소앙의 단군민족주의와 관련하여 하나 더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은 그가 젊은 시절에 천명하였던 국수보전론적 사상이다. 1909년에 <대한흥학보>에 발표한 논설의 한 대목을 먼저 인용해본다.

“국민된 자로 하여금 가히 숭배하며 가히 구가할 자는 國粹的 史筆이 是也라. … 영국의 國粹保守는 영국인이 擔負한 者이오, 미국의 국수保守는 미국인이 擔負한 자이오, 일본인의 국수보수는 일본인의 담부한 자이오, 我 대한의 국수보수는 아 대한 千萬 민족이 共通擔負한 자이라. … 만약 국수를 一失하면 其國은 곧 丘墟를 化作하야 淪亡하는 至慘極痛에 遂至함이라.”

여기에서 국수를 잃으면 그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는 생각은 한말 이래 단군민족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국수보전론 그것이다. 국수란 민족적 정체성에서 핵심 되는 문화유산이나 역사인식을 가리키며, 민족을 보전하고 구성원의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국수를 보수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된다. 한말ㆍ항일운동기의 단군민족주의자들은 한민족만의 특유하고 우수한 역사와 사상ㆍ문화적 유산 속에서 민족의 존재근거와 가능성을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국수 중에서도 특히 민족고유의 역사와 독자적인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본 단군시대의 국수와 단군자손으로의 민족정체성인식을 특히 중시하였다.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은 단군에서 출발한 고유 역사를 학문적으로 확인하여 드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었고 주시경 등은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연구하여 보전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대종교인들은 단군에 의해 시작된 고유종교를 국수의 핵심으로 보고 그의 부활을 민족적 생존의 기본조건으로 생각하였었다.

한말에 소앙이 천명한 국수보전론 역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11년의 일지(동유약초)가 날짜를 적음에 있어 단군건국 연호를 먼저 언급한 것은 단군민족주의적 국수보전론을 공유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수에 대한 소앙의 생각은 한말에 신채호 등이 갖고 있던 그것으로부터 한발 더 나아갔다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국수는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확보하는 장치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타개할 수 있는 지혜와 지침이 포함된 문화유산이었던 것이다.

소앙은 민족 고유의 국수 속에서 민족의 미래를 여는 지침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특히 단군시대의 역사와 사상 속에 민족통일전선과 통일국가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와 지혜가 있다고 보았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홍익인간 사상과 [신지비사]가 전하는 고유의 정치사회적 조직원리(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였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