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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태일의 『한문화 산책』 - 성노예

기사승인 2018.07.07  22:3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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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의 내 인생 짓밟힌 인생/마음속 그 아픔 한시인들 잊지 못해/아이고 아이고 잊지를 못해/눈물도 말라버린 여자의 이름 도라지 꽃/...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 오끼나와에서 죽은 배봉기 할머니가 불렀다는 ‘도라지꽃’의 일부다. 더럽혀진 몸으로 고향에는 갈 수 없다며 이 노래를 불렀다. 이름 없는 도라지꽃으로 살다가 낯선 이국땅에서 온갖 수모와 핍박을 견딘 조선여인의 산조가락이요 한(恨)맺힌 영가이다.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위안부들은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로 강요당한 것은 반인륜적인 끔찍한 범죄다.

 생존한 170여명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가 된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끌려갔다. 대부분 16세 전후의 어린 소녀들을 납치했으며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모멸은 필설로 묘사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인간이 그렇게도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악랄의 극치였다.

 밤낮으로 수십명의 군인을 상대했고 생리조차 개의치 않았으며 임신, 출산, 양육이 방치되었고 낙태가 강요되었다. 강제노동에 온갖 수모와 구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예생활 그 자체였다.

 더욱 참담했던 것은 패전 후였다. 일본군은 그들을 적지에 방치한 채 떠나버렸다. 일본군의 ‘갈보’로 갖은 모멸을 당했고 현지에서 성노예로 전락했으며 남의 집 종살이 등 최하층 노동자들로 연명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임을 시인하고 성노예피해자의 손해배상을 일본법원에 제기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의 양심적인 국제변호사 ‘도츠카 에츠로(戶塚悅郞)’는 10년 동안 일본정부의 성노예 규탄과 배상책임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그는 ‘위안부가 아니라 성노예다’란 책을 썼다. 그의 노력이 결실되어 지금은 UN산하기관들이 국제적 통용어로 성노예로 부르고 있다.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조약에서 배상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노예와 같은 중대인권유린범죄는 이른바 국제법상 '제노사이트(Genocide)'의 원칙에 해당하며 시효가 없다. 손해배상의 의무는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한일협정당시에는 성노예문제는 표출되지도 않았고 재산문제만 처리했을 뿐 일본의 형사처벌 의무를 해제하지 않았다.

 국제사회단체들의 보고서나 결의안에서도 이런 원칙들이 공통적으로 지적된다. ‘93년 ’반 보벤‘최종보고서에도 원상회복원칙, 일본의 손해보상원칙을 천명했고 UN총회에서 결의안으로 채택했다.

 ’97년 ILO전문가위원회 보고서에서도 성노예는 강제노동에 해당하며 일본의 손해배상을 의무화했다. ‘98년 ’맥두걸‘유엔보고서인 ‘전시의 조직적 강간, 성노예 특별보고서’에도 동일한 배상책임을 결의했다.

 제네바에서 열린 제61차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종군위안부 등 전쟁범죄를 삭제한 일본정부의 역사왜곡이 도마 위에 올라 집중난타를 당하며 국제사회에서 뭇매를 맞았다. 그러면서도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꿈꾸는 일본이이야말로 염치도 없는 낯 두꺼운 사람들이다.
 
 일본은 적어도 성노예에 관한한 명백한 ‘범죄국가’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듯이 끝까지 그 사실을 부인해 왔다. 미국신문에 위안부동원에 강압은 없었다는 광고까지 냈다.

 도쿄대학 후지오카 노브카스(藤岡信勝)교수는 위안부는 결코 강제연행된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진해서 돈을 벌기 위해 일본군대에 종군한 매춘부란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교수인지도 의심스러운 사람이다. 일본정부도 반성은커녕 지금까지 위안부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미국 하원이 ‘위안부’결의안을 채택하기로 하자, 이를 무산시키기 위해 5개 ‘로비’회사를 총동원해 결의안 상정과 채택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위안부’결의안은 미국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그동안 집요한 로비에 막혔으나 10년만의 결실이다.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인정과 총리의 사과를 요구하고 책임론까지 거론하고 있다.

 미국하원 외교위원장은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부인하면서 오히려 희생자를 탓하는 이런 구역질나는 일본대응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 했다. 캐나다 호주도 비슷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일본 35개 시민단체들도 위안부문제에 대해 공식문서로 사과하고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베’총리는 결의안 통과를 유감이라 했다.

 독일은 나치전범재판으로 668명을 사형시켰다. 빌리 브란트 독일수상은 유대인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했다. 나치정권 피해자들에게 지불된 배상금만 1400억 마르크(약 70조원)라 한다. 이처럼 독일의 과거청산은 진솔했다. 전후 일본 정치인들은 무릎을 꿇는 일은커녕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하는 등 속죄하는 마음조차 없다.
 
 위안부 망언으로 궁지에 몰린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는 사죄하겠다며 면담요청을 했지만 위안부할머니들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하시모토는 ‘면담대상이 아니라 심판대상’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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