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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하 교수의 『남북한 단군영정 통일을 위한 제안 2』

기사승인 2018.09.15  11: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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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조선의 건국연대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것은 이제 허구가 아닐 수 있다

남북한 단군영정의 통일을 위한 제안
(Proposal for Unification of Dangun-portrait of South and North Korea)

항공대 우실하 교수

 

 

 

 

 

 

 

 

단군조선, 더 이상 허구나 신화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2) 요(堯)임금의 도성 평양(平陽)으로 밝혀진 도사(陶寺)유적의 발견과 단군조선

2015년 12월 21일 중국고고학회 이사장 겸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소장인 왕외(王巍)는 국무원 기자회견장에서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 2004-2015)’을 마무리하며 기자회견을 했다. 주요 내용은 (1) 도사유적은 요임금의 도성인 평양(平陽)이며, (2) 요순시대는 실제 역사시대이며, (3) 도사유적은 BC 2500-BC 1900의 것이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석경(石磬), 악어가죽으로 만든 타고(鼉 鼓) 등이 나오는 가장 큰 무덤들은 ‘BC 2400년경의 방국(方國) 단계의 왕릉’으로 본다. 영문요약문에는 도사유적에 대해서 “BC 2400년경 조기의 사전(史前) 국가의 수도 (the capital city of early prehistoic state around 2400 BC)”로 표현하고 있다. 도사유적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도사유지는 산서성(山西省) 임분시(臨汾市) 양분현(襄汾縣) 도사진(陶寺鎭) 도사향(陶寺鄕) 도사촌(陶寺村)에서 발견된 용산문화(龍山文化) 도사유형(陶寺類型) 유적지다. 도사유지는 도사문화로 격상되어 불리기도 한다. 임분시의 행정중심지 요도구 바로 남쪽에 붙어 있는 양분현 중심지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다.

둘째, 전체 유적지 총면적은 430만㎡이며 옛 내성과 외성을 갖춘 쌍성(雙城)으로, 외성 안의 면적이 280만㎡, 내성 안의 면적이 13만㎡에 달하는 거대한 ‘방국(方國) 혹은 왕국(王國) 단계’의 도성 유적이다.

2015년에는, (1) 도사유지의 동북각문(東北角門), 동남각문(東南角門), 궁성남문(宮城南門) 등 내성(內城)인 왕성(王城)의 여러 문들을 발굴했는데, (2) 동북각문과 동남각문은 돈대(墩臺) 형식의 수비 시설로 보이고, (3) 궁성남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4) 내성인 궁궐터만 해도 남북 270m 동서 470m의 장방형으로 면적이 13만㎡다.

셋째, 아래층인 앙소문화 ‘묘저구(廟底溝) 2기 문화’는 나이테 수정을 거친 절대연대가 BC 2900-2800년이다. 도성(都城) 유적은 BC 2500-1900년, BC 2450-1900, BC 2500-2000년 등으로 나오는데, 일반적으로는 BC 2500-1900년으로 본다.
 
조기-중기-만기 각 시기별 편년은 각 유적지에서 나온 시료의 측정치가 100-200년 정도 겹치는 것이 많아서 통일된 견해는 없고, 각 시기별  측정치의 중간값은 조기는 BC 2450년, 중기는 BC 2200년, 만기는 BC 1950년이다. 학자에 따라서 약 100-200년의 차이가 있다.
 
직접 발굴을 지휘한 하노(何弩)는 도사유지의 중심 유적은 약 400년간 지속되었고, (1) 조기는 BC 2300-2100년, (2) 중기는 BC 2100-2000년, (3) 만기는 BC 2000-1900년으로 보고 있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조기를 좀 더 높게 잡았다. 곧, 석경(石磬), 악어가죽으로 만든 타고(鼉鼓) 등이 나오는 가장 큰 무덤들은 ‘BC 2400년경의 방국(方國) 단계의 왕릉’으로 본다. 영어요약문에는 도사유지에 대해서 “BC 2400년경 조기의 사전(史前) 국가의 수도(the capital city of early prehistoic state around 2400 BC)”로 표현하고 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결국 도사유지의 왕궁은 기원전 2400-2300년경 요임금의 왕궁인 평양이라는 것이다.

넷째, 도사유지에서는, (1) 홍동(紅銅: 청동이 아닌 순동을 말함)으로 만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동령(銅鈴: 순동 방울)과 순동으로 만든 ‘톱니가 있는 바퀴’인 동치륜(銅齒輪), (2) 동령을 비롯한 도고(陶鼓)•타고(鼉鼓: 악어가죽을 덧씌운 북)•석경(石磬)•도훈(陶塤) 등 각종 악기, (3) 천단을 겸했다고 보는 최초의 관상대(觀象臺)와 남문 밖의 지단(地壇) 등의 제단, (4) 조-중-만기의 내성(=왕궁)과 외성(=외곽성)을 갖춘 이중성 구조의 280만 평방미터의 거대한 궁성(宮城)와 왕룽, (5) 신분에 따라 나눠진 주거지, (6) 예제(禮制)의 확립, (7) 2개의 문자가 있는 납작한 토기인 ‘문자편호(文字扁壶)’가 발견되어, (7) 명실상부한 ‘방국(方國)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으며, (8) 도사유지에서 가장 큰 왕릉을 “왕의 신분을 지닌 방국의 수령급 인물(王者身分的方國首領人物)”의 묘로 보고 있다.

도사유지에서는 4개의 작은 동기(銅器)가 발견되는데, (1) 홍동령(紅銅鈴), (2) 홍동환(紅銅環), (3) 비소를 합금한 신동(砷銅)으로 만든 동치륜형기(銅齒輪形器), (4) 동용기(銅容器) 잔편(殘片) 등이 발굴되었다. 도사유지에서 발견된, (1) 홍동령(紅銅鈴)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복합 거푸집을 사용한 동기[複合范銅器]’이며, (2) 동용기(銅容器) 잔편(殘片)은 비소를 섞은 신동(砷銅)으로 만든 것으로 동이모양의 동분铜盆)의 일부로 보고 있다.

다섯째, 각종 문헌기록에 신화처럼 기술된 요순(堯舜)시대가 실존하고, 도사유지가 바로 ‘최초의 중국(中國)’이라고 보고 있다.

도사유적의 발견은 중원지역 황하문명의 문명사를 하(夏)-상(商)-주(周) 이전의 요순(堯舜)시대로 끌어올려 ‘당요(唐堯) → 우순(虞舜) → 하우(夏禹) → 상탕(商湯) → 주공(周公)’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재정립하고 인정한 것이다.

<자료 7> 도사유지의 위치: 산서성(山西省) 임분시(临 汾市) 양분현(襄汾县) 도사진(陶寺镇)

 <자료 8> 양분 도사유지 발굴보고서(2015.12월 출판. 필자 소장)

  
<자료 9> 도사유적 답사 자료(2016.8.16일)

1. 유적지 인근 발굴전시관 입구
* ‘최초의 중국(最早中國)’, ‘제요고도(帝堯古都)’, 문자편호(文字扁壶)에 보이는 2개의 문자를 강조.

2. 요임금의 왕성인 평양(平陽) 모형

  * 유적지 총 면적 :  430만 평방미터
  * 외성 내부 면적 :  280만 평방미터
  * 내성 내부 면적 :   13만 평방미터(남북 270m, 동서 470m)

3. 문자편호(文字扁壶)에 보이는 중국 최초의 문자 안내문과 사진

 * 이것이 갑골문보다 약 1천년 앞서는 동북아 최초의 문자이다.

 * 사진의 좌측이 ‘문(文)’자이고, 우측은  ‘堯/易/明/命’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은 요(堯)자로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각종 사서들은 요임금이 즉위한 시기와 단군조선의 건국 시기가 비슷한 시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1) 『위서(魏書)』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로, (2) 고기(古記)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요임금 즉위 50년 후”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어 아사달(阿斯達) 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요堯:고려 정종의 이름 ‘요堯’를 피하여 기록하기 위함]와 같은 시기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 단군 왕검은 당고(唐高)[당요]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庚寅年; 요堯가 즉위한 원년元年은 무진戊辰년이니, 50년은 경인庚寅년이 아니라 정사丁巳년이므로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

『위서(魏書)』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단군조선 건국연대를 당요(唐堯)와 같은 시기로 보고 있다. 고기(古記)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해서, ‘당고(唐高)=당요(唐堯)=제요(帝堯)가 즉위한 후 50년’인데 이것은 경인년(庚寅年)이 아니라 정사년(丁巳年)이라고 수정하고 있다.

그런데 요임금에 대해서 중국학계에서는 통용되는 것은, (1) 요가 천자에 오른 해인 제요원년(帝堯元年)을 ‘갑진년(甲辰年)’이라고 보고 있고, (2) 학자들이 여러 자료를 검토하여 내린 제요=당요원년은 ‘기원전 2357년’으로 보고 있으며, (3) 20세에 천자에 오르니 생졸연대를 약 BC 2377—2259년으로 보고 있다.
 
만일 중국학계의 논의대로 제요원년을 갑진년인 BC 2357년으로 보면, (1) 단군조선의 건국연대인 ‘당고가 즉위한 후 50년’은 BC 2307년이 되고, 현재 통용되는 단군조선의 건국연대인 BC 2333년과 불과 26년밖에 차이가 안나며, (2) ‘요임금과 같은 시기’인 BC 2357년이라면 통용되는 BC 2333년과 불과 24년 이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기원전 2333년은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수정한 것처럼 ‘당고 즉위 원년을 갑진년이 아니라 무진년으로 보고, 이로부터 50년 후인 정사년’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떤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 추론인지는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또한, 조선시대 전기(1485, 성종 16)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최부崔溥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중 「외기(外紀)」에서도 단군조선의 건국 년대가 ‘당요의 무진년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있어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움에 그가 바로 단군이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바로 당요의 무진년 때 일이다. (... 중략)   [신 등이 생각키로] 『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은 요임금과 더불어 무진년에 재위에 올랐으며, 우 그리고 하의 시대를 지나 상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48년이다”라 하였는데, 이 이야기는 의심이 된다.  지금 생각건대, 요임금이 재위에 오른 것은 상원갑자 갑진년 때이며 단군이 재위에 오른 것은 그 25년 뒤인 무진년이니 ‘요임금과 더불어 재위에 올랐다’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중국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제왕세기(帝王世紀)』, 『시경(詩經)』, 『상서(尙書)』=『서경(書經)』 등 많은 사서들은, ‘요임금의 도읍이 평양이다(堯都平陽)’,  ‘요임금이 봉해진 곳이 당국(唐國)이다’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도사유지의 발굴로 요임금이 전설이나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였음이 밝혀진 이상, 단군조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연구가 필요해졌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도사유적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성이자 요임금의 왕성=왕도인 평양(平陽)임이 밝혀진 상태라면, 단군조선의 건국연대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것은 이제 허구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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