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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칠십 세 번째

기사승인 2018.09.16  15: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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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열음, 인성 열음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역지사지 그리고 여행 - 다름 만남 여행 

너, 다름을 만나고 아는 만큼, 내 생각을 더 여는 속에 나와 너의 소통크기는 커진다. 다름과 소통하고 다름을 이해함에서, ‘여행’하려는 의지와 자세는 아주 중요하다. 여행(旅行, tour)의 어원은 ‘깃발(旗) 아래 모인 집 떠난 장병들(人+人)’인 여(旅)로 이어지고, ‘돌리기, 전환하기’를 뜻하는 영어 turn으로 이어진다.

여행은 나, 여기, 집, 같음, 한계 혹은 ‘우물’을 떠남이고, 남, 다름을 보고 묻고 생각하고 느끼며 만나는 일이다. 여행은 한 마디로 ‘다름 만남’이다. 아니면, 같음 떠남? 같은 말이던가? 혹은, 그냥, 열음?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시간 속으로든 공간 속으로든, 자전거를 타고든 비행기를 타고든, 책을 통해서든 대화를 통해서든 혹은 그냥 상상을 통해서든, 여행은 같음 속에 갇힌 자신의 생각을 열고 다름과 만나고 소통하는 길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책 읽기는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 남의 머리로 생각하기’다.

같음을 상대화할 수 있을 때, 같음에 거리를 둘 수 있다. 상대화는 하나의 존재가 상대의 존재, 상대와의 관계,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 속에서만 의미 있음을 이른다. ‘왜 다름은 상대화 안 하고, 같음만 상대화할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다름도 상대적이다. 다만, 같음과 나는 경우의 수가 하나라면, ‘나-바’(나/) 내지 나의 환경인 다름의 그것들은 둘도, 백도, 만도 아닌 거의 무한할 수 있다. 다름과의 만남을 통한 혹은 다름과의 만남을 위한 생각 열음은, 결국은, 우리 개인들의 사람크기와 삶의 크기를 키울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전제다.

여행은 우물 안의 좁은 시야를 떠나, 넓은 세상의 갖가지 다른 풍물과 문물들을 만나는 일이다. 넓은 세상의 색다른 풍물들과 문물들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계속 놀랄 수 있게 된다. 보면서 놀라고, 놀라면서 물으며, 물으면서 생각의 넓이와 깊이를 넓히고 깊이며, 생각의 크기를 키워 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더 넓어지고 더 유연해지고 더 열어진 나는 이제 상대의 다름을 더 이해하고 더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나 자신도 더 이해하고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사랑 ‘애기’(愛己)는 남-사랑 ‘애인’(愛人)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 다름 만남, 여행은 다름을 알고 이해하고 인정하고 배려하면서 다름과 함께할 수 있고 공존할 수 있음의 시원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으로 우물 안에서 보고 듣던 것만이 다가 아니라, 이는 한 부분에 불과함을, ‘여행의 크기’에 따라서는, 부분도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행은 한 판단이 유효한 범위를 ‘부당하게 늘이는’ 부당주연(不當周延)의 오류를 자각하는 원천이랄까?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 다른 것에 대한) 열정적인 호기심이 있을 뿐’이라 했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여행하기는 정신을 놀랍게 고상하게 만들며 우리들의 모든 편견들을 청소해준다.’라고 했고,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 von Alexandria, 기원전 15?~기원후 40)은 ‘맹인들과 잘 볼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한 번도 여행을 하지 않은 사람들과 많이 여행을 한 사람들과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그런데 여행으로 집을 떠났으면, 다시 집에 돌아와야 한다. 서울의 집에서 대부도를 거쳐 변산 반도로 향하고, 이를 거쳐 진도를 갔다가 다시 하동으로 가고, 하동에서 공주로 오더니, 다시 속리산으로 가고, 가고 또 가고...

혹은 21세기 한국을 떠나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페르시아 왕조로 가고, 셰익스피어로 갔다가 한비(韓非, 기원전 280?~ 233)로 옮기고, 니체로 가더니 다시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를 거쳐 십자군 전쟁으로 가고, 다시 당송팔대가와 다산(丁若鏞, 1762~1836)을 거쳐 로크(Locke, 1632~1704)로 가더니, 이내 만델라(Mandela, 1918~2013)와 마이클 샌델(M. Sandel, 1953~)로 가고 또 가고...

가족이 있고 안식이 있는 집으로 안 돌아와도, 집에 돌아왔지만 집에 다시 붙들리게 되어도 문제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와도 ‘일일신우일신’을 향해 끊임없이 열려는, 떠나려는, 만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런 자세는 일종의 ‘같을 수 있는 다름’이요 ‘다를 수 있는 같음’이 아닐까? 아니면, ‘같음과 다름 사이’? 그리하여, ‘같음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기’? 혹은, ‘같음과 다름을 다 아우르기’?

그러나 직접 떠나는 여행은 많은 비용을 요한다. 가이드를 하거나 책을 쓰고 다큐멘트를 만들고 홍보를 하면서 여행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한, 혹은 상품을 판매하거나 구매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지 않는 한, 바쁜 일상을 접고 지출할 데 많은 돈을 절약하여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의지대로만 되지 않는 것 또한 현실이다.

여기에서도 다름을 만나고 배우면서, 나의 세계를 넓히고 남과 다름을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여행의 자세를 갖춤이, 여행하기 자체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다름에 열고 다름을 만나고 접해보려는 관심과 자세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면, 독서나 다큐멘트 등 간접만남을 통해, ‘적은 다름’을 짧은 시간 동안 접한다 해도 큰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달라진 시선과 관심, 물음 속에 ‘같은 것이 같지 않게 보인다’. 다르게 보인다. 그러니 일종의 여행이다. 또, ‘적은 다름’을 만나더라도, 생각과 느낌을 되돌아보며 기록할 때, 여행의 효과는 몇 배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남들과 만나 소통하기도, 넓게 정의하여, 여행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남들과의 만남 속에서 생각의 열음, 나눔, 키움의 방법은 여행의 효과를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 실시간의 대화와 소통을 따라올 수 없는 점은, 여기서는 생각하는 존재, 말하는 존재들이 서로 보고 봐지며 묻고 물어지는 주체이자 객체로 만나 서로 다른 경험과 생각들을 효과적으로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남들의 경험과 시각을 경험하면서, 일정한 방식으로 남들로 되어보고, 남들을 내 안에 통합하면서 나를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는 또 역지사지의 계기로도 되어 남들을 보다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충분히 키워줄 수 있는 다름 크기가 여기에 꼭 전제된다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이는 하나의 같음이 또 하나의 같음을 만나는 일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토론문화, 대화문화는 또 하나의 여행문화라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눈을 ‘크게 뜬다면’ 혹은 ‘다르게 뜬다면’ 그때그때 그곳 그곳의 삶 자체가 여행이리라.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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