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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대전으로 본 동아시아 패권의 역사 [7부]

기사승인 2018.09.16  16: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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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우리 민족에게 아픔과 시련, 일본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

 

■ 한국전쟁은 일본 최대의 천우신조(天佑神助)

가. 한국전쟁에서 일본이 얻은 것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아픔과 시련의 역사이지만 일본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였다. 한국 전쟁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최악의 경제상황으로 고통받던 패전국이었다. 일본경제는 1920년대 수준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전쟁 패망 후 일본은 무장과 무력행사를 금지 당했다. 여기에 모든 권력과 치안은 미군정의 지위 및 명령을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일본 시민들은 패전국으로써의 모든 책임을 지고 살아야 했다.

일본 경찰은 치안을 유지하기 보다는 교통정리나 민원업무를 보조하는 수준으로 공권력을 유지하면서 버티고 있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치안유지가 주목적인 7만 5천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경찰예비대를 창설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은 미군기지를 지킬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1952년 보안대로 변경했다가 1954년 자위대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날 최첨단 자위대라는 막강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실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연합군의 길을 안내하고 전투에 참가하기까지 한다.

 

일본경제 성장 변동 지표

 

나. 일본경제 성장 변동

일본경제는 원자재의 부족, 전력난 등 각종 악재와 노사 간의 대립갈등으로 인해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토요다 자동차는 노사문제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도 생산직 노동자를 더 이상 고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도요타는 각종 군수차량 및 부품 생산을 통해 엄청난 생산판매를 하게 되었고, 이는 자동차 생산기술의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일본은 이때 정부기관인「특수조달청」을 마련해 독점재벌의 총연합체인 「일본경제인연합체」내에 「방위생출산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기관을 통해서 미국이 요구하는 군수품의 생산을 적극적으로 보장했다.

1952년 6월에 도달해 군수품 생산에 약 400여개의 공장이 참가했고, 후에 그 수는 860여개로 증가했다. 이 당시 미군에게 제공하는 군사물품의 금액만 25억 달러 이상이었다고 하니 이 금액이 일본 경제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때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극우세력은 지금 독도망언 등 일본군사대국화를 획책하는 주요 세력으로 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부흥시킨 총리로서 평가되어지고 있는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에 대해서  말 그대로 “가미가제”(神風)라고 표현하였으며, 또한 당시 일본경제단체연합회(日本 經濟團體聯合會, 經團聯)의 회장이었던 이시카와 회장은 “천우(天祐: 하늘의 도우심)”라고 하였다고 한다.

1964년 8월 3일 발간된 주간문춘(週刊文春)이라는 잡지는 “조선전쟁(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운명은 크게 변했다. 기적의 번영이라 불리는 일본의 이 번영은 조선전쟁(한국전쟁)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 타인의 불행이 이같이 극단적으로 일방의 행복으로 된 예는 역사상 있어 본 일이 없다.”고 썼다. 우리에겐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불타는 서해

1967년 1월, 북한군은 해상 분계선 인근에서 순찰중인 남한 해군함을 공격하여 침몰시킨다. 그러나 이후 북한은 주로 동해와 남해를 통해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는 전략을 활용한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1968.10.30)과 강릉 잠수함 간첩침투사건(1996.09) 등이 그것이다.

경기만이 남북한 대치의 장이 된 것은 1999년 6월 제1차 연평해전이 발발하면서 부터이다. 꽃게 철을 맞아 북한 어선과 경비정이 북방한계선 남쪽 2km까지 내려오면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 해전에서 대한민국 해군이 승리했지만 2002년 제2차 연평도 해전으로 이어져 이때는 우리가 패한다.

북방한계선은 지난 53년 8월 30일 유엔군사령관이 우방의 함정 및 항공기 초계활동의 북방한계를 규정, 남북 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선언한 해상경계선으로, 북한은 서해 NLL을 '유엔사가 일방적으로 선언했을 뿐'이라며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북방한계선(NLL)을 놓고 벌이는 남북한의 신경전은 급기야 2009년 11월, 서해 분계상 인근에서 남북한 교전을 야기했으며, 2010년 3월 천안함 격침과 2010년 11월 연평도 도발로 이어진다.

 

8부가 곧 이어집니다

< 글 : 상생방송 구성작가 김덕기 >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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