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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태일의 『한문화 산책』 - 단군은 도처에 살아있다

기사승인 2018.09.17  17: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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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정신문화원 명예교수로 있던 박성수교수가 일본에서 단군신앙의 유적으로 환웅상을 찾아냄으로써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사실이 있다. 발견된 곳은 남해안과 마주 보고 있는 일본 북구주(北九州) 소에다라는 마을이다. 소에다는 서울의 옛 말에 해당하는 소호리에 연유한 지명으로 보인다.

 이 소에다 마을에 있는 히꼬(하늘의 아들이란 뜻)산 해발 1200m의 심산에서 바로 하늘의 아들인 환웅상의 그림과 목각상이 각각 한 점씩 발견된 것이다. 검은 턱수염과 눈, 코 등 안면처리, 그리고 어깨에 늘어진 박달나무 잎들이 선명한 점은 우리나라 단군상과 일치한다.

 일본의 사학자들도 한국의 단군신앙이 일본으로 건너 온 것으로 보며 현재 히꼬산 마루에 남아 있는 신당에는 백산신이 모셔져 있다.

 백산신은 물론 한국의 백두산신, 즉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백산신앙이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전해졌느냐에 관해 일본 사학자(나가노 교수)는 신라 화랑도 이전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로 이곳 사람들은‘수험도’라는 수도단체가 오랫동안 전승해 왔고 또한 수도내용이 화랑도의 그것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험도의 전성기엔 이 지방 전체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42만 명이 신도였다고 한다. 또한 이를 믿는 집을 단골집으로 불리어졌고 수도자들은 마늘을 즐겨 먹었으며 지금도 이 지역에선 마늘장아찌를 담는다고 한다. 이러한 수험도는 19세기 중엽, 명치유신 정부의 금지령으로 인해 해산된 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과 북구주에 단군신앙의 유적이 있다는 사실은 오랜 옛날부터 조선족의 일본열도 진출 및 개척사실을 입증해주고 단군신앙의 역사성을 확실히 하는 근거가 된다.

 박교수는 1986년부터 1년간에 걸쳐 경향신문이 후원하는 단군기행 시리이즈에 참여하여 연재한바 있다. 전국의 산천과 마을을 누비고 마지막으로 일본원정을 통해 살아있는 단군을 찾아 헤맸다.

 그는 일본에서의 단군문화를 확인하며 고대로부터 우리문화를 고스란히 전해 받았던 일본이 지금은 오히려 우리문화를 더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단군이 신화의 세계로만 인식된 것은 내선일체라는 음모 하에 일제가 우리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저지른 역사조작 때문이었다.

 또한 단군시대를 신화로 간단히 치부하고 역사에서 잘라내어 버린 행위도 실증사학이란 이름의 또 다른 무지라고 비판했다.

 당시 그는 “단군유적에는 기본 틀인 신산, 신목, 신당, 신정(神庭), 신도 등 5가지를 구비하고 있다.”며 “우리민족만큼 5천년동안 그 순수성을 지켜온 민족 신앙은 드물다.”고 보았다. 또한 “예로부터 마을 입구에 서있는 당산나무와 솟대,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사찰마다 모셔진 산신각, 바위신앙 등은 바로 이런 단군문화의 잔상들이다.”고 했다

 불교가 들어와 민족 신앙과 공존하긴 했지만 산신각을 모시지 않고는 불교가 민초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단군신앙은 외래종교나 문화와의 접촉 속에서도 우리문화의 도도한 기층을 형성해 왔다.

 그는 한 달간의 단군유적을 찾는 일본기행에서 마음속에 많은 앙금 같은 것을 남겼다고 했다. 대마도의 돌 솟대, 가고시마의 줄다리기, 오키나와의 한국신 등 가는 곳마다 단군의 흔적과 삼신사상, 그리고 단군을 제사 지내는 천제(天祭)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마치 노다지를 찾은 기분이었다는 것이고 보면 아직도 단군을 부정하며 역사왜곡을 주도해온 우리나라 일부 사학자들에겐 학문적 오류를 반성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박교수는 당시 “아직도 단군을 무속과 같이 미신시하는 것을 보면 큰 비애를 느낀다.”고 했다. 더구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던 국사당(민간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은 일제 치하 신사를 지을 때 헐려 지금은 인왕산 중턱에 초라하게 밀려나 있다.

 또한 조선조 임금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원구단(圓丘壇)은 흔적조차 알아보기 어렵게 방치되어있다. 그의 주장처럼 어느 민족이든 초기문화의 본질에는 재래종교가 자리하고 있는 만큼 우리문화의 원형질은 단군문화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단군신화가 도처에 살아 있는데도 국보는 물론 중요 문화재 속에도 단군 문화유산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는“자기 문화를 이렇게 푸대접하고서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국민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변명으로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뼈아픈 충고를 부연으로 달고 있다. 

 이렇듯 민족의 역사 문화 뿌리를 바로 잡고자 늘 노력했던 박성수 교수는 환국-배달-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상고사를 규명하고 세계에 알리는 세계환단학회 회장과 (사)대한사랑 이사장 및 삼균학회 회장을 맡아 활발히 활동해 오시다 지병이 악화되어 2016년 3월 3일 한 줌의 흙과 함께 한민족 9천년 역사 속으로 영면하셨다.

 

제갈태일 한문화연구회장, 칼럼니스트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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