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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태일의 『한문화 산책』 - 일제의 약탈, 몰수, 독식

기사승인 2018.10.06  01:2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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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에는 일제의 경제침략의 전모가 기록되어 있다. 먼저 일본인은 조선의 토지약탈부터 시작했다. 1907년 국유미간지이용법을 제정하여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구실로 토지를 약탈했다.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 출간본 모음, 사진출처=<한겨레> 2006년 06월 01일 김기봉 경기대교수 고전다시읽기

 1908년에는 이른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토지약탈이 조직화되면서 1년에 3만 정보의 토지를 약탈하기도 한다. 아울러 토지약탈이 진행되면서 일본농민들의 이주가 계속되었다.

 일본의 토지약탈은 철도용지와 군사용도라는 토지수용법으로 확장되었다. 이런 경우 국유지는 무상으로 약탈했고 사유지는 조선정부가 이를 사들여 제공했으므로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어야 했다.
  
 심지어 일본인 투기업자들은 철도부지 예정지를 미리 탐지하여 조선인으로부터 헐값으로 사서 나중에 조선정부로부터 고가로 팔아 재산을 불리기도 했다. 1910년 일본식민지로 전락한 후 소위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일본의 체계적인 토지약탈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12년 반포된 토지조사령에 의해 토지의 소유주는 정해진 기간 안에 그의 주소와 성명 또는 명칭과 아울러 소유지의 지목, 지적 등을 토지조사국에 신고함으로써 그 사유권을 인정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은 민족감정으로 신고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또한 일반농민들에게 이 사실이 철저하게 알려지지도 않아서 신고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자기 소유이면서도 신고하지 않았던 토지는 모두 총독부에 몰수당했다. 그리고 조선왕실의 땅이거나 공공기관에 속해 있었던 땅들도 모두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삼림령(森林令)에 의해 국유산림도 모두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그 결과 1930년대의 통계에 의하면 총독부가 소유한 전답과 삼림을 합한 토지면적은 888만 정보로 이것은 전국토의 40%에 해당하는 것이라 한다. 총독부가 조선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이렇게 약탈하고 몰수한 조선의 토지와 삼림들은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이 경영하는 토지회사와 일본이주민들에게 헐값으로 불하되었다. 그 중에서도 동양척식회사는 소유 토지가 가장 많아 여기서 받아들이는 소작료는 1년에 미곡(米穀)만 50만석에 달했다고 하니 일제의 경제수탈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잡곡은 쌀보다 훨씬 더 많아 소작료가 쌀의 두 배에 해당되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의 경제수탈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토지뿐만 아니라 각종 지하자원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금의 확보를 조선에 전적으로 의지했다.
 
 일본은 약탈적인 방법으로 조선으로부터 금을 채광해 갔고 일본에서의 금본위제도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총독부는 조선 각지의 광산을 조사하여 이를 일본인 재벌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결과 각종 지하자원의 채굴은 급격히 증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금, 은, 철, 중석, 석탄 등이 평년에 비해 5~6배 내지 몇 천배까지 증가하였다. 이런 증가는 특히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가장 심했다. 그것은 일본이 연합국 측에 물자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우리 산의 나무들을 벌목했다. 겉으로는 식목을 장려하는 척 했지만 깊은 산골의 아름드리 거목들을 마구 벌목해 갔다. 특히 금강송이 심했다. 춘양에서 실어 나른다 해서 춘양목이란 별칭도 생겼다.
 
 아울러 일찍부터 일제는 일본 어부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독도를 불법적으로 일본에 편입시키는 한편 독도의 강치라는 물개사냥으로 씨를 말리는 포획을 일삼았다.

 더구나 조선합병 후에는 일본어부들의 조선이주를 적극 권장하여 일본어부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들은 조선어부보다 우수한 선박과 장비로 많은 어획고를 올리며 조선바다를 독식했다.
 
 결국 총독부는 조선에서 가장 큰 기업체가 되었다. 철도, 항만, 항공 등의 시설을 운영하고 인삼, 소금, 아편 등을 전매하였으며 여기서 나온 이익을 독차지했다. 요컨대 총독부를 필두로 일본인 회사들은 유리한 조건으로 많은 자원을 독점하며 조선경제를 철저히 수탈했다.

 1905년 일본은 신 화폐를 만들어 교환시켰다. 당시 조선화폐는 엽전과 동전이 있었는데 그 질에 따라 갑, 을, 병으로 나누었다. 병종은 무효로 선언하고 교환해 주지 않았다. 문제는 병에 해당하는 동전이 전체동전 중의 2/3를 차지했으므로 조선인은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그 대신 일본인들은 화폐정리로 큰 반사이익을 보게 되었고 나아가 일본은행이 조선의 금융 산업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조선은 많은 차관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와 국채부담이 더욱 늘어났다. 국민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일본의 경제수탈은 공출제도 등으로 조선인의 의식주마저 핍박했다. 쌀 한 톨을 남기지 않고 빼앗아갔고 나중에는 밥그릇까지 강탈하여 군수물자로 썼다. ‘한’민족말살의 막장까지 이르게 된다.

제갈태일 한문화연구회장, 칼럼니스트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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