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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박사의 『유목민 이야기』 - 동로마 제국과 훈족

기사승인 2018.10.15  1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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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훈족 왕에게 700 리브라(파운드)의 황금을 매년 바쳐야

루아 왕은 죽기 전에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내 동로마 제국이 “아밀주리, 이티마리, 툰수레스, 보이스키 등의 족속들”을 훈족에게로 송환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고 톰슨 교수는 이들 족속들이 훈족에 속한 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사료에는 잘 나오지 않는 부족명이기 때문이다. 톰슨은 말하기를 이들은 루아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를 거부한 훈 부족들이었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당시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반달족으로부터 아프리카 속주를 탈환하는 일을 돕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당한 병력도 아프리카로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훈족과 전쟁을 할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으로 넘어간 자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하라는 루아 왕을 달래고 협상을 진행하기 위한 사절을 파견하려고 하는데 루아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

동로마는 환희에 휩싸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느님이 훈족의 왕에게 벼락을 내려 로마를 구원해주셨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아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블레다와 아틸라와 협상을 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협상은 상부 모에시아 주의 마르구스 시 성벽 밖에서 말을 탄 채 이루어졌다. 마상회담이라 할까 유목민식 회담이었다. 로마측 대표인 플린타와 에피게네스는 불편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말에서 내려 차마 말 탄 상대를 올려다보며 협상을 할 수는 없었다.

역사에서 ‘마르구스 평화협정(435)’으로 불리는 이 조약에서 양측은 훈족이 요구한 대로 국경을 넘어 동로마로 넘어오는 도망자들을 훈족에게 모두 송환하며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쳐오는 로마인 포로도 송환하기로 약정하였다. 포로의 몸값은 솔리두스 금화 여덟 닢이었다. (5세기 중반 로마 병사의 1년 식량비용이 4 솔리두스였다) 또 훈족과 전쟁을 하려고 하는 족속과는 로마가 어떠한 동맹도 체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규정하였다.

중요한 조항이 또 하나 있었는데 이는 훈족에게 로마인들과 동등하게 로마의 시장에서 안전하게 교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유목민에게는 주변 족속들과 교역을 원활히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곡물 같은 생필품을 교역을 통해 얻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로마는 평화조약이 지켜지는 대가로 훈족 왕에게 700 리브라(파운드)의 황금을 매년 바쳐야 하였다. 이는 약자가 강자에게 바치는 조공(tribute)이었던 것을 물론이다.

아틸라와 블레다는 이 조약을 체결한 후 스키타이 지역으로 방향을 돌려 훈족에게 복종하지 않는 족속들을 정벌하였다. (프리스쿠스, Blockley, 227) 몇 년 동안 동로마 제국은 훈족의 침략 위협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훈족의 왕들과 체결한 조약을 준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약속한 공납을 계속 연체하였다. 훈족의 도망자들도 계속해서 로마 영토 내에 살고 있었다.

그러자 몇 년간 동로마 제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던 훈족이 441년 행동을 개시하였다. 훈족은 동로마가 상당수의 훈족 도망자들을 숨기고 있다고 하면서 이들을 내어줄 것(프리스쿠스는 로마인들 가운데 사는 훈족 도망자들의 수가 많았다고 한다)과 훈족의 왕들 묘지를 도굴한 마르구스 주교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로마 측의 거부가 개전의 구실이 되었다.

훈족 부대는 다뉴브 강을 건너 많은 도시들과 요새들을 함락시켰다. 훈족에게 함락된 도시들 중에는 비미나키움(Viminacium)이 있었다. 현재의 베오그라드에서 동쪽으로 90 km 정도 떨어진 다뉴브 강 남쪽의 도시로 당시에는 상부 모에시아 속주의 수도로 군사요충지였다. 비미나키움은 이 때 훈족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한 세기 뒤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야 재건되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남쪽 20 여 km 정도에 있는 마르구스 시도 함락되었다.

마르구스 시는 현재 세르비아의 파자로바츠(오스트리아는 ‘파사로비츠’라고 불렀는데 1718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에 있었다. 침략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마르구스 주교가 주민들이 자신을 훈족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자 아틸라에게 도망쳐 대가를 약속 받은 후 다시 훈족 병사들을 데리고 몰래 돌아와 훈족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훈족은 비미나키움과 마르구스를 함락한 후 로마의 군사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마르구스는 먼저 나이수스(현재 세르비아의 니슈)가 공격의 목표가 되었는데 이 도시는 세르디카(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직행하는 길과 남쪽으로 그리스의 테살로니카로 내려가는 도로가 갈라지는 요충지였다. 나이수스는 튼튼한 성벽으로 구축되어 있어 공격이 쉽지 않았으나 훈족은 공격을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동원하였다.

프리스쿠스는 훈족이 동원한 공성기계들을 상세히 묘사하였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진 유목민족에 대한 이미지와는 달리 훈족은 성을 공격할 수 있는 정교한 설비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훈족이 동원한 많은 기계장치들의 수에 나이수스 성을 지키던 자들은 완전히 압도되었다. 결국 공성추가 성벽을 허물고 허물어진 성벽으로 사다리를 통해 훈족 군사들이 성에 진입, 성은 함락되었다.

훈족은 나이수스를 함락한 후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진격하지는 않았다. 당시 훈족에 의해 파괴된 또 다른 도시들로는 신기두눔과 시르미움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기두눔은 오늘날의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이며 시르미움은 그로부터 50 여 km 서쪽에 있는 오늘날의 세르비아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 해당한다. 즉 나이수스 함락 후에는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두 도시를 공격하고 시르미움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데리고 귀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측과 강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로마는 훈족이 요구한 도망자들의 송환과 함께 공납금을 두 배로 올린 1,400 리브라로 약속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훈족 도망자들은 동로마 군대 내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어주기가 무척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황제는 공납금도 지불하지 않았다. 그는 아프리카 원정에 파견했던 병력을 불러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전비도 허겁지겁 마련하였다.

443년 동로마 제국의 태도에 대해 아틸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다뉴브 강을 건너 다키아 리펜시스 주의 수도이자 다뉴브 경비함대의 기지였던 라티아리아 시(현재 불가리아 북서부에 위치)를 함락한 후 나이수스를 거쳐 세르디카, 필립포폴리스(오늘날의 불가리아 제2의 도시 플로브디프) , 아르카디오폴리스(오늘날의 터키 륄레부르가즈), 콘스탄차(다뉴브 강이 흑해 로 유입되는 곳에 위치한 콘스탄차인지는 명확하지 않다)를 함락하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근처에서 동로마 군대와 접전이 있었으나 동로마 군대는 아틸라 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훈족 부대는 거의 난공불락의 성벽을 자랑하던 콘스탄티노플은 내버려두고 바다로 향했다. 로마 군대가 케르손네소스 반도(오늘날의 갈리폴리 반도)로 퇴각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덮쳤던 것이다. 아스파르 장군이 지휘하던 동로마 군대가 케르손네소스에서 패배함으로써 동로마는 훈족에게 평화조약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로마의 협상사절 아나톨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아나톨리우스 평화조약’(443)이라 불리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틸라도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해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 강화에 동의하였다. 훈족의 도망자는 즉시 송환될 것이고 향후 어떠한 도망자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동로마는 약속하였다. 그 동안의 공납 연체액 6,000 리브라의 황금도 지불할 것이다. 훈족에게서 도망친 로마의 포로의 몸값은 예전의 8 솔리두스에서 12 솔리두스로 인상되었고 매년 바쳐야 할 공납금은 황금 1,400 리브라에서 2,100 리브라로 인상되었다.

역사가 프리스쿠스는 이러한 약속이 동로마에게 부담스런 금액이었다고 한다. 동로마 정부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쥐어짜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자들은 부인의 보석과 가구를 팔아 돈을 마련하였다고 하였으며 굶어 죽는 자도 나왔다고 말한다.

조약이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비준되자 도망자들을 인수하고 약속된 돈을 받기 위해 훈족의 사절이 즉시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다. 그러나 훈족의 도망자들은 훈족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해서 로마는 이들을 모두 살해해버렸다. 그 가운데는 아틸라의 몇몇 친척들도 끼어 있었으나 훈족의 사절은 여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Thompson, 94)

이후 447년까지 훈족의 공격은 없었다. 훈 제국 내에서 내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틸라가 445년 그의 형 블레다를 죽이고 제국 전체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내분의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나톨리우스 조약 이후 훈족과 동로마 사이에서는 여러 차례 사절들이 오갔는데 사소한 이견의 차이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447년에는 다시 훈족의 침공이 있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져 않다. 아마 로마가 공납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에는 훈족 뿐 아니라 훈족에 복속된 여러 족속들도 동원되었다. 아르다릭 왕이 지휘하는 게피다이인들, 발라메르가 지휘하는 고트족 등이 참여한 것으로 요르다네스는 적고 있다.

당시 훈족 연합군은 일리리아, 트라키아, 다키아, 모에시아, 스키티아 전역을 공격하였다. (《로마나》 331) 성휘파티우스의 생애를 쓴 사람에 의하면 당시 훈족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된 도시는 백 개가 넘었다고 한다. 452년의 《갈리아연대기》에는 그 숫자가 70 여 곳으로 나온다. 당시의 한 역사가 마르켈리누스 코메스의 말에 따르자면 “아틸라는 거의 전 유럽의 도시들과 성채들을 공격하여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Thompson, 103)

아틸라 군은 콘스탄티노플은 그냥 지나쳤다. 447년 1월 큰 지진이 일어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크게 무너졌는데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석 달 만에 보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틸라 군대가 진군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튼튼한 성벽을 상대로 싸워봤자 힘만 낭비할 뿐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아틸라 군은 동로마 군대의 저항을 받지 않고 그리스까지 내려가 맘껏 약탈을 즐겼다. 마르켈리누스에 의하면 그리스 전쟁사에서 유명한 테르모필레까지 갔다고 한다.

이번에도 동로마와 평화조약이 있었다.(448) 조약의 구체적 내용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443년보다 훨씬 가혹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프리스쿠스를 통해 우리에게 조약의 내용이 하나 전해진다. 신기두눔으로부터 노바에(불가리아의 스비슈토프)까지 다뉴브 강 남쪽 일대를 비무장지배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이는 국경을 다뉴브에서부터 5일간의 거리 즉 150 km 정도 남쪽으로 후퇴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앞에서 말한 다뉴브 강에서 한참 떨어진 나이수스가 새로운 국경이 되었다.

실제로 다뉴브 남쪽 지대는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사람이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 449년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본영을 향해 이 지대를 지났던 프리스쿠스는 나이수스 같은 큰 도시에도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로마는 군사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뒤엎을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후 동로마의 노력은 가혹한 조약의 내용을 완화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서적】

E. A. Thompson, The Huns (Blackwell, 1996)
R. C. Blockley, The Fragmentary Classicising Historians of the Later Roman Empire, Eunapius, Olympiodorus, Priscus and Malchus. Text, Translation and Historiographical Notes, Francis Cairns, 1983.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박사

 

노종상 기자 rohgawo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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