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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 박사의 『환단고기』 위서론 논박論駁 II

기사승인 2019.11.05  00: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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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론僞書論이란?

위서僞書의 사전적 의미는 ‘비슷하게 만든 가짜 책’이며, ‘위조문서僞造文書’의 줄임말이다. 문자가 생겨난 이래 수많은 글이 쓰여졌고, 책이나 문서로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문서들은 없어지기도 하고 보존되기도 했다.

그 중에는 거짓된 정보를 담은 문서도 있을 것이고 사실을 기록한 문서도 있을 것이다. 물론 거짓된 정보를 담은 문서는 문서로서의 가치가 없겠지만 이를 위서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위서는 수많은 문서 중에서 의도적으로 그 문서의 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조작하거나 창작한 문서에 한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어떤 목적에서든 문자가 생겨난 이래 위서는 존재했을 것이고, 위서라고 오해받는 문서들도 있을 것이다. 위서는 진실을 호도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든 학문적으로든 악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만일 어떤 문서가 위서라는 것이 입증된다면 그 문서의 가치는 상실되기 마련이고, 그 위서를 만든 사람은 비난받거나 사회적, 법적 책임을 벗어나기 힘들다.

문제는 어떤 문서를 위서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혹은 위서로 판명되기 위해서는 그 문서 작성의 의도와 그렇게 작성된 문서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여부가 명확히 입증되어야 한다. 의도적으로 거짓된 내용의 문서를 작성한다면 이런 문서는 위서임이 분명하다.

‘위서론’이란 이렇게 ‘어떤 문서가 위서임을 밝히기 위한 입장이나 논리’를 말한다. 그런데 어떤 문서를 위서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문서의 내용에 대한 객관적 접근과 과학적 분석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렇게 분석된 내용이 거짓임을 밝혀야할 뿐 아니라, 그 거짓 문서가 작성된 의도까지도 드러내야 한다. 왜냐하면 ‘의도적으로 거짓된 내용을 기술한 문서’가 위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도’는 자백이 없는 한 드러나기 어렵다.

전체 내용이나 사실을 왜곡하려는 의도가 없는 경우 위서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재야 역사학자인 박병섭은 위서와 진서를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의도적인 조작과 비의도적인 조작을 구분하면서, ‘의도적’ 조작일 경우 의도성을 객관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비의도적이라면 그것은 위서에 대한 정의定意 상 위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많은 저술들이 비의도적으로 첨삭된 경우가 많지만 그 자료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역》은 태호복희씨에서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덕경》은 왕필이 덕경과 도경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동양의학의 성서인 《황제내경》은 황제 헌원에 가탁하여 전국시대를 거쳐 한대漢代에 성립되었고, 불교의 《화엄경》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편집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문서들에 대해 현재 그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없다. 오랜 기간의 첨삭에서 의도성과 비의도성을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위서의 기준 또한 애매하다. 이럴 경우 그 내용에 대한 가치분석, 사실관계 등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박병섭은 “가치 있는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면 위서니 진서니 규정해 연구의 생략을 정당화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일일이 검토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진서, 위서 논란은 애매모호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동양 고전 중에서 《열자列子》의 경우를 볼 때 위서의 기준이나 평가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열자》는 도가 계열의 철학서로 《도덕경》과 《장자》와 함께 ‘도가삼서道家三書’로 불린다. 이 책의 저작 연대나 전해진 과정을 살펴볼 때 현재 남아있는 《열자》를 위서라고 부를만한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열자가 실존 인물인지, 혹은 열자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는 주장들이 있다. 그리고 유향劉向이 《열자신서목록列子新書目錄》에서 말하는 바처럼 《열자》는 그 내용상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도 말한다.

양계초는 《고서진위급기년대古書眞僞及其年代》에서 《열자》에는 진晉대의 불교 사상과 불교 이야기가 보이는데 이는 그 주를 쓴 장잠이 《열자》를 가짜로 만든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단언하고 있다.

특히 《열자》 속에는 가상의 인물이나 역사적인 인물과 관련된 우화들이 등장하는데 그 우화는 대체로 필자가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김학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열자》는 이미 전해지고 있던 열자의 책을 바탕으로 하고 후세 사람들이 여러 자기 이야기들을 주워 모아 더 보태어 한나라 시대 이후에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 같은 책이 이루어진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곧 그 이전에 《열자》와 관계되는 원본이 있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으며...


다양한 부정적인 평가가 있음에도 《열자》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아가 《열자》에 대한 연구는 《열자》 자체를 위서로 규정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오히려 《열자》가 첨삭되어 내려온 과정이 도가 사상의 형성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평가조차 한다.

물론 철학서는 역사서와 달리 그 기록이 사실과 부합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사상을 기록한 것이므로 그것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열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엄밀하게 ‘열자가 저작한 철학서’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 현존하는 《열자》를 위서로 배척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의 저작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정치상황, 문학, 지리, 종교 등에 대해 다양한 기록과 함께 개인적 평가를 하고 있다. 《사기》는 정사正史로 분류되는 데, 정사는 정통적正統的인 역사기록을 의미한다. 즉 올바르고 정확한 기록이 아니라 정통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이 《사기》를 기록할 때 국가의 명을 받은 사가史家로서 저술한 것은 아니다. 궁형을 받기 전 태사령의 직책에 있었으나 그 이후에 중서령이 되었고 《사기》의 본격적인 기록은 그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을 스스로 평가하는 〈태사공자서〉는 이를 말해준다.

《사기》는 오제五帝 중에서 황제黃帝에서부터 기록을 시작하는데, 황제는 전설시대 인물로 그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었다. 사마천은 중국을 돌아다니면서 들은 이야기나 기존의 단편적 기록들을 취사선택하여 〈황제편〉을 기록했다. 이러한 《사기》의 기록이나 관점이 모두 사실과 부합하거나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다양한 비판을 받는다.

《사기》 역시 《열자》와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동안 다양한 이유로 첨삭되어 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 당시 기록물의 보관이나 전달이 현대처럼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점이다. 《史記의 世界》를 저술한 홍순창 교수는 《사기》의 전승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기》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래되는 과정에서, 혹은 타인의 글이 찬입되었거나 또 망실된 부분이 있거나 하는 현상이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되며 또 그것이 사실로 밝혀져 있다. 《사기》 판본의 년대는 확실하지 않고 송대 이후에 일반화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그 이전의 《사기》는 사본으로 전해져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장 11세기 간에 걸쳐 필사되어 온 《사기》의 사본은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원형을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므로 필사되어 오는 과정에서 오사誤寫, 착간錯簡, 윤색潤色, 찬입竄入, 망실亡失 등 다른 고전이 겪은 과정을 《사기》도 겪었을 것이다.


특히 홍교수는 《사기》가 그 내용상 당대에는 불온서적으로 취급받았다는 점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한서》의 내용에서 기원전 28년 《사기》를 하사받기를 원한 동평왕의 청원이 거부되었는데 그 이유를 “《태사공서》(《사기》의 본래 이름:필자 주)에는 전국 종횡 권모술수, 한왕조 흥기 초의 모신謀臣의 기책奇策, 천관의 재이災異, 지형地形의 좁고 막힘이 있다. 이것이 다 제후왕 때에 있다는 것은 부당하니...”라고 밝힌 것을 들고 있다.

이러한 당대의 《사기》 평가는 후에 그 내용을 윤색 혹은 오사, 찬입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마천을 비판하는 사람들, 혹은 연구가들은 《사기》를 위서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럼 우리 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잘 아는 사서인 《삼국유사》는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데 각 판본의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최근 연세대 손보기 교수가 소장해오던 《삼국유사》를 연세대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이 책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조선초기 목판인쇄본)이다.

이 판본에서는 이마니시류가 조작하여 출간한 《삼국유사》의 ‘석유환인昔有桓因’이란 구절이 ‘석유환국昔有桓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이마니시는 의도적으로 기록을 조작하였고, 이를 근거로 환국의 존재를 은폐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초기의 기록을 후대에 의도적으로 글자를 조작하여 내용을 바꾼 경우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를 거친 문서들에 있어서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몇몇 오류나 내용첨삭, 글자 수정으로, 더구나 그 전체 내용이나 사실을 왜곡하려는 의도가 없는 경우 위서로 규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홍순창 교수가 《사기》를 사료로 사용할 때는 반드시 문헌비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단 《사기》의 문제 뿐 아니라 고대에서 전해 내려온 사서나 철학서 등 모든 문서에 적용되는 것이다.

(계속)

 

지승용 기자 jsr6867@naver.com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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