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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의 위상 - 월북 동기와 배경

기사승인 2019.11.13  22:4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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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현대사 연구가)
前 독립기념관 관장

 

김원봉의 월북 또는 북한체류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첫째, 신변의 위협이다. 거듭되는 백색테러의 위협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이미 몇 곳에 비밀 은신처를 두고, 수시로 옮겨 다니면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경찰의 감시망과 테러에 대한 위협은 날로 가중되었다.

둘째, 정치상황의 변화이다. 해방정국은 미국이 단독선거를 통해 남한에서 친미정권을 세우려는 정책이 확고해지면서 중간 ․  좌파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없어졌다. 김원봉은 더 이상 남한에서 정치적 활동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셋째, 1947년 8월 12일 새벽 미군정경찰이 서울 수표동 소재 김원봉의 자택을 수색하는 등, 우익 백색테러와 함께 군정경찰에 의한 검거 위협이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이때 미군정 경찰의 체포령이 내려졌다.

넷째, 비슷한 시기에 남로당과 민전 산하단체에 대한 폐쇄조처와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허헌을 비롯하여 좌파인물 10인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졌다.

다섯째, 당시 북한에는 김원봉의 예전 동지들인 조선의용대(군) 옌안파 인물들이 정치적 기반을 잡고 있었다. 이들과는 비록 중국공산당 측의 분리정책으로 옌안과 충칭으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동지적 유대감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남한에서 정치적 공간을 잃어가던 처지에서 옌안파 동지들이 건재한 북한을 택했을 가능성이다.

여섯째, 북한정권에서 실세로 활동 중인 최용건과 관련설이다. 최용건은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을 거쳐 광저우봉기에 참여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시절에 김원봉과 교우가 있었을 것이고, 이후 최용건은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관으로 일제와 싸웠다. 최용건은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을 맡는 등 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런 최용건과의 관계로 김원봉이 북한을 택하게 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의열단 특강에 나선 김삼웅(현대사 연구가) 前 독립기념관 관장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아 상해에서 약산과 첫 대면한 뒤 귀국 후 6개월 여 동안 약산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황용주(전 MBC 사장)는 김원봉의 북행원인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약산은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또 그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성향의 약산이 북행한 것은 민전이 흐지부지되고 좌우합작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여러 가지 어려운 국내 정황 속에서 취할 수 있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김원봉의 월북은 이상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이유가 조건과 배경이 되고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충칭시절 김원봉의 비서였던 사마로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상하이에서 “북한으로 가지 말라”는 서한에 대해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매우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어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고 답신한 것으로 보아 “신변위협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라고 썼다.

유석현ㆍ김승곤 등 의열단 출신과 독립운동가 이강훈 등은 한결같이 미군정경찰에 의한 신변위협을 월북동기로 인식한다.

김규식의 비서로 북한에서 열린 연석회의에도 참가한 송남헌은 “(장택상이 그의 부친 문제로) 불만을 가지고 그를 비롯한 진보적 해외지도자들 - 장건상, 김성숙 등을 수도청에 구금한 것이 직접 원인이었던 것 같다.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월북한 것 같다.”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담긴다.

이와는 달리 약산 개인의 동기가 아니라 민전의 입장에서 살펴야 한다는 주장도 따른다.

그는 민전 의장이라는 좌익 최고위급 간부의 한사람으로서 적어도 1947년 8ㆍ15까지는 미소공위 재개 및 성사를 위한 대중투쟁을 가장 앞장서서 이끌었던 사람이다. 미소공위 결렬 후 민전은 남한단독정부 수립반대 투쟁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고 이때 민전은 남한의 좌익, 나아가 중간파 세력과 북한의 좌익을 엮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으며 그 성과가 남북협상회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민전은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북한정부에 참여한다는 방침도 아울러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약산은 이 같은 민전의 노선에 충실히 따랐고 북한잔류도 그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5회로 이어집니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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