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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 박사의 『환단고기』 위서론 논박論駁 Ⅲ

기사승인 2019.11.21  15: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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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환단고기》 위서론의 발생배경 

《환단고기》의 저자와 몇 가지 단편적인 내용 및 편집 년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모든 입장을 ‘《환단고기》 위서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이하 위서론이라 약칭) 대표적인 위서론자로는 조인성과 이도학, 박광용, 이순근, 이문영) 등이 있다.

이들의 《환단고기》 위서론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고 여기서는 왜 그들이 위서론을 주장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앞에서 필자는 오래된 사서들이나 철학서들의 저자나 저술 년대를 정확히 규정할 수는 없다거나 그 후에 편집 보완된 것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위서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들 서적에 위서 운운云云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환단고기》(혹은 《규원사화》, 《제왕운기》 등 우리의 사서)에 대해서는 위서의 잣대를 과도하게 적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환단고기》가 우리 민족 고대사의 영광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태도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는 이것이 문제였다.

위서론자 조인성은 ‘《환단고기》가 전하는 내용에 따르면 우리나라 상고사는 찬란한 영광의 역사이며 신시 시대에 이미 국력과 문화면에서 중국을 능가하였고 단군왕검 때부터 대륙에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내용은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우리 고대사 학계의 연구 성과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종래 학계에서는 《규원사화》나 《환단고기》를 무시하여왔다.”는 내용이 불행하게도 대표적 위서론자인 조인성이 말하는 ‘《환단고기》가 기존의 역사학계에서 배척되어온 이유’이다.

물론 여기서 핵심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기존의 연구 성과와는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이유이다.

기존의 연구 성과라는 것은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한국 고대사 내용이다. 즉 고조선의 역사성을 의심하거나 축소하는 입장, 그리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주장,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여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국통맥을 잘못 분석하는 것 등이다.

예를 들어 《단군세기》에서는 ‘단군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고열가단군이 계해癸亥 58년(기원전 238년) 단군제위를 포기하고 입산수도한 뒤, 오가五加가 6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북부여에 흡수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기존 교과서는 고조선의 역사를 기원적 108년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망했다는 것으로 종결짓는다. 즉 위만조선을 우리 고조선의 정통 역사로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이 공인되면서 우리 고대사는 역사는 짧게, 국토는 좁게 축소되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논조로 《환단고기》를 비판한 사람이 이순근이다. 그는 〈고조선은 과연 만주에 있었는가〉라는 글에서 《환단고기》의 주장은 지금까지의 교과서적 내용과 차이가 있어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광대廣大하고 강대强大한 고조선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다.

최근 고조선의 위치와 범위 및 그 사회적 성격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주장되고 있다. 이 견해들은 지금까지 통설로 되어 있는 교과서적 견해와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이순근은 “이들 고기류의 기록들은 사료적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록 자체가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며 즉, 《환단고기》의 고조선 관련 내용은 기존의 교과서적 내용과는 다른데, 《환단고기》 자체가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라고 판단되므로 《환단고기》의 강대한 고조선 관련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기존의 학계 주장인 교과서는 인정하고 《환단고기》는 부정하고 있다. 그럼 왜 작은 국토, 짧은 역사를 가진 고조선을 그토록 옹호하는 것일까?

우리 역사가 축소 은폐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일제 강점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식민정책으로 우리의 역사를 축소하고 민족혼을 비하하는 정책을 썼고 그러한 역사학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우리의 강단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근대적 역사 서술과 조선사 편찬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일제는 도처에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독버섯을 심어놓고 물러갔다. 안타깝게도 해방 후 이들이 국사학계를 주도하였다.

특히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우리나라 사학계, 그 중에서도 고대사 학계를 장악했다. 자신들의 학문 범위와 실증사학이라는 테두리를 정해 놓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의견은 학계에서 살아남지 못하게 매도하는 것이 이 학파의 특징이다. 

식민사학을 바탕에 둔 강단사학이 주류를 이루던 학계에 《환단고기》의 등장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일단 그들이 만들고 가르치던 것과 완전히 다른 내용은 결코 그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환단고기》를 부정하는가, 자신들의 기존의 학설을 부정하는가의 선택이 주어졌고, 그들의 선택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 자신들의 학설을 지키는 것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경우는 기존의 학설을 지키기 위해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환단고기》의 내용이 기존의 연구 성과와 다르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까?

《환단고기》가 우리 민족이 겪은 비참한 식민역사나 뒤떨어진 문화유산을 기록하고 있거나, 반대로 대륙을 지배한 대국의 지위와 찬란한 정신문화와 유적을 가진 민족이라고 기록하고 있거나, 역사학에서 주어진 문제는 동일하다.

그 역사 기록을 철저히 검토해서 그 진실 여부를 확인하고, 만약 반증反證되지 않는다면 일단 기록된 사서의 내용을 존중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학자적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위서론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각자 《환단고기》를 접하고 이 역사서의 내용을 학자적 태도로 분석하기 보다는, 앞서 발표된 《환단고기》 위서론과 관련된 글을 읽고 이에 동조하는 내용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글쓰기를 한다.

예를 들어 이도학은 〈역사를 오도하는 상고사의 위서들〉이란 글을 쓰면서 “이 글은 조인성교수의 논고를 비롯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제반 문제점들을 검토하는 동시에 이 작업을 토대로 역사를 바로 보는 눈을 정립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즉 조인성의 글을 바탕으로 《환단고기》 위서론을 주장한다는 말이다.

그럼 이도학가 근거로 하고 있는 조인성은 어떠한가? 조인성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서 “이에 본고에서 필자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와 그것들이 쓰여진 연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고 하면서 위서론자의 예로 이도학과 그의 논문 〈재야사서 해제 《환단고기》〉를 들고 있다.

즉 조인성은 반대로 이도학의 글을 근거로 하고 있다. 박광용 역시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에서 “이 글에서는 그 중 가장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우선 대상으로 해서, 기왕의 논고들에서 어느 정도 비판되어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라고 말한다.

위서론자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들이 서로 의지하는 위서론이란 것이 모두 근거 없는 것들이다. 결국 잘못된 근거를 서로 옹호하면서 자신의 또 다른 위서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위서론의 대표자격인 조인성은 《환단고기》와 《규원사화》가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1980년대 당시 그러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대한 기왕의 사료비판에 따르면, 이 두 책은 위서이거나 위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학계에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무시하였던 것도 사실 이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나 믿음은 결코 바람직스럽게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즉 조인성은 《환단고기》에 대한 기존의 위서론을 근거로 위서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한다.

조인성이 말하는 ‘기왕의 사료비판’이란 누가 쓴 어떤 글인가? 이는 송찬식(〈위서변〉), 이도학(〈재야사학 해제 《환단고기》〉), 이순근(〈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조인성(〈《규원사화》論 添補〉,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일검토〉) 등이며 바로 위서론을 이끄는 몇몇 학자들의 글이다.

놀랍게도 조인성은 여기서 위서론을 이끄는 ‘기왕의 사료비판’에 자신의 이름과 글을 두 번이나 올리고 있다. 학계에서 《환단고기》를 무시한 원인은 기왕의 사료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사료비판은 결국 서 너 명의 학자이며, 조인성은 그 속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위서론이 학계의 일반적 논조인 것처럼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실 필자의 〈《환단고기》 위서론 논박〉의 논지에서 볼 때 송찬식은 《환단고기》 위서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가 〈위서변〉을 발표한 때는 1977년으로 《환단고기》가 아직 세상에 출간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그 외 박광용도 위서론자이지만 조인성이 이 글을 쓸 당시에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라는 글이 발표되기 전이라 누락되었다. 그래도 위서론자들은 10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위서론은 소수의 몇몇 학자가 기존의 학설과 반대되는 《환단고기》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 위해 만든 허위주장, 조작된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 5장에서 다룬다.

(계속)

 

 

한韓문화타임즈 webmaster@hmh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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