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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는 동성왕의 백제-북위 전쟁 승리 역사를 기록해야

기사승인 2020.07.05  12: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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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왜 교과서에서, 박물관에서 사라졌나?

박물관에서 사라진 동성왕의 북위와의 전쟁 기록 

공주지역 박물관과 전시물의 백제 동성왕 설명에서 북위와의 전쟁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단히 역사학계에 실망스럽고 박물관 측에도 유감이다. 

웅진백제역사관에는 웅진백제를 이끈 왕들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설명을 덧붙였다.  동성왕 설명에서 북위와의 전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활시위를 당기는 용맹스러운 동성왕의 모습을 그렸으나 그의 최대 업적인 '북위와의 10년 전쟁'이 빠져있다. 

공주 소재 웅진백제역사관에는 연대표가 있다. 그중  동성왕 부분에서 그가 한 일을 기술하고 있으나 어디에도 북위와의 전쟁은 써있지 않다. 전쟁에 비하면 사소한 일들인 사신파견이나 궁궐수리는 적으면서 말이다.

송산리고분모형전시관에 있는 연대표다. 동성왕 즉위와 무령왕 즉위 사이에 "남제에 조공"과 "탐라에서 사신을 보내 사죄함"의 연도가 나오고 있다. 역시 북위와의 전쟁에 비해서 아주 사소한 사건에 불과하다. 게다가 남제에게 조공이라고 하면 남제가 백제에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나 오히려 백제가 상국의 위치에 있다. (이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처럼 공주지역의 박물관과 전시관에는 동성왕을 설명하는데 있어 북위와의 대전쟁을 기술하지 않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백제의 연대표를 다루거나 하는 곳에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왜 그런가? 무엇이 문제인가?  왜 분명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 전쟁을 적지 않는 것일까? 

사실 백제-북위 전쟁은 우리 학계가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대륙백제설과 관련되어있는 중심 사건인데다가 이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경우에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한사군 한반도설,낙랑군 평양설>이라는 기본 프레임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지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 중국의 고대 역사책에도 대륙 백제를 기술해 있지만 우리는 아직 그런 역사를 학교 교육에서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동성왕의 행적과 업적에서 북위와의 전쟁은 완전히 삭제되어있다. 북위와의 10년에 걸친 5차례의 전쟁은 백제가 겪은 고구려의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쟁과도 비길만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거대한 전쟁에서 승리한 동성왕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동성왕 재위) 10년(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백제 본기 동성왕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기록을 자세하지 않게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488년에 북위와 전쟁이 있었음을 정리해놓고 있다. 그나마 우리측 기록이 한 문장이나마 남아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중국의 《자치통감》에도 488년의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자치통감도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북위(위나라)가 백제에게 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남제서>에는 이때 위나라가 기병 수십만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병(騎兵)의 기(騎)는 말탈 '기'다. 말탄 병사들이다.

이 해(490)에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로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위로'는 '북위'를 말함)

북위는 초기에는 하북성과 지금의 산서성 일대를 차지했다가 나중에는 허난성까지 차지하는 강국이 된다. 바다를 크게 접하고 있지않은 국가란 얘기다. 말탄 병사 수십만명을 이끌로 백제를 쳤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아무리 항해술이 발전한 나라라 하더라도 기병(騎兵)을 수십만명이나 배에 싣고 나를 수는 없다.  북위의 기병 중심의 군대가 배를 타고 충청도까지 와서 백제와 싸웠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식민사관의 태두 이병도 교수는  어이없게도 배타고 와서 충청도까지 와서 싸웠다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출처 : EnCyber.com

북위의 수만의 기병이 황해를 건널 수도 없고 고구려를 통과할 수도 없다. 말탄 기병 수십만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백제를 쳤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된다. 결국 북위의 말탄 기병 수십만명과 전쟁을 벌이는 백제는 한반도 백제가 아니라 대륙에 있는 대륙백제라는 것을 추정 짐작할 수 있다.  

다시한번 자치통감으로 돌아가보자.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나라때부터 요서와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 자치통감 권 136 제기齊紀 2 세조世祖 상지하上之下 영명6永明六년(488년)

뒷문장까지 보니 요서, 진평 2군의 백제가 확실해졌다. 이렇게 대륙백제가 있다면 북위 기마부대와의 전쟁이 가능해진다. [자치통감]의 "백제가 진나라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했다"는 내용을 통해서 기병 중심의 북위와의 전쟁기록이 이해가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백제의 대륙경영,대륙백제 즉 요서,진평군에 관한 기록은 자치통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중국의 송서(宋書), 양서(梁書), 남제서(南齊書), 북제서(北齊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양직공도(梁職貢圖), 통전(通典),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등에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방을 다스린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자.

출처 : 나무위키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晉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고구려) 동북에 두었다." -[남제서] <백제전

"그나라(백제)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천여리 밖에 있었는데, 서진 때에 구려(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다스리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령하여 스스로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남제서] <백제전>

[주서(周書)]백제전 "백제는 동진(東晋)때부터 남송(南宋)과 양(梁)나라때까지 양자강 양쪽을 다 점거하였다."

"백제국이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양자강 좌우를 차지하고 있었다." -[북사] <백제전

"봄 정월…백제의 왕 여창을 사지절 도독 동청주자사로 삼았다."
-[북제서] <후주기> ,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란 조상이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이나 된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10여만 호가되는데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후대에 점점 강성해져 모든 조그마한 나라들을 병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양서] <백제전>

"백제는 예부터 내려오는 동이의 마한에 속한다. 진(晉)말에 구려(駒麗)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양직공도  **(낙랑= 백제)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남방 월주에 닿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 국경까지 남쪽은 왜국에 이른다. 백제는 동(한반도),서(중국대륙) 두 곳에 서울을 두고있다." -[구당서] <백제전

"백제가 망한 후 그 땅은 신라, 발해, 말갈에 의해 나눠어졌다." -[구당서] <백제전>, -[신당서] <백제전>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을 차지했다" -[통전] <제도사>(당나라 제상 두우 편찬)

"백제국이 양자강 어구를 좌안을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이르기 까지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 때에는 중원을 차지하였다."-[주서 49권] <백제전>​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송서] <백제전>​

"송서에서는 백제가 다스리던 곳으로 진평군을 거론하고 그 도성을 거발성이다 라고 하였다. 거발성은 진평성이다. 그 곳은 지금 금주, 영원, 광녕의 경내(요서 지역)에 있다. 백제의 또 다른 도성인'고마성'은 조선국(한반도)에 있다. -[흠정만주원류고] <대청제국 건륭제>

"금주, 의주, 애춘을 포함한 지역이 다 백제의 강역이다." -[만주원류고]

"백제왕은 동, 서의 두성에서 거주하는데, 동쪽 성은 공주(충청도)로서 당시 국왕의 제2의 수도였다. 서쪽성은 지금의 부여현이니 양나라때 명농왕이 이산성에서 살았으며 성산으로도 쓰고 산동 영성현 동쪽에 있다." -[신당서 각외국전 지리고증] <대청제국 말기학자 정겸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 연, 제, 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삼국사기] <최치원전>

이렇게 수많은 문헌에서 백제의 대륙경영을 얘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국사교과서는 이런 일이 없는 듯 삭제 되어있다. 정말 대단한 역사학계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중국의 정사 , 한국의 정사에 나오는 일치된 수많은 기록들을 모조리 무시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역사 권력은 누가 쥐어준 것인가? 


동성왕은 북위와의 이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장군들을 광양태수, 청하태수, 광릉태수, 성양태수로 봉했다. (위 지도 참고) 모두 중국의 지명이다.  그지역이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일대이다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무평 2년 봄 정월 백제왕 여창(餘昌)을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로 삼았다. 

6세기 중후반에 북위의 후신으로 화북 동쪽 지역을 통치한 북제(北齊;(550∼577)가 백제의 위덕왕(威德王)에게 ‘동청주자사’라는 직함을 내렸다. 청주는 산동반도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고, 실제로 유송(劉宋;420∼479)의 명제(明帝) 태시(泰始) 연간에는 산동반도 동남부 지역에 ‘동청주’가 설치된 바 있었다. 

후한 행정구역 중 청주

그렇다면 위덕왕이 동성왕 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켜낸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북제로부터 승인받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합리적 추정일 것이다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남중국 역사서에 백제의 북중국 점령이 기록된 것은 남중국이 북중국을 폄하할 목적으로 거짓 역사를 기록했기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북중국 역사서에 이런 사실이 기록되어있지 않았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남중국과 북중국이 서로 견제하다보니 남중국이 백제의 북중국 점령을 자기네 역사서에 기록했을 거라 믿고 있는 것이다.

<송사>를 제외한<양서>와 <남사>는 북중국이 중국 전체를 통일한 뒤에 편찬된 책이다. 양서와 남사는 북중국을 계승한 당나라때 편찬되었다. 따라서 이 책들은 북중국이 편찬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중국이 북중국을 조롱할 목적으로 그런 사실을 기록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하면 백제가 요서땅을 점령했음을 부정하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알  수있다.

요서,진평 백제의 멸망 연대를 기록한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진평이고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 둘째 산월, 셋째 좌월이다. (고구려 21세 문자제) 명치 11년(50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 회계, 오성, 좌월, 산월, 천주라 하였다


명치 12(단기 2835,502)년에 신라 백성을 천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보내어 요서,진평 등의 군을 쳐서 빼앗으니 백제군이 없어지고 말았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 노 오 월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의 작위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역과 세금과 특산물 납부를 모두 본국에 준하여 하게 하였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환단고기에는 백제땅이 요서, 진평 등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 21세 문자제 제위시에 요서, 진평의 백제군 지역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기록도 함께 나와 있다. 이 해가 502년이다. 동성왕이 시해된 다음해로 백제로서는 어수선하고 약화된 시기를 틈타서 고구려가 요서,진평의 백제땅을 없애버린 것이다. 


이상과 같이 백제- 북위의 전쟁 기록이 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결론을 다시 정리하면, 고구려하면 수당전쟁이 생각나듯이 백제에게는 북위와의 승전의 기록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 영토를 지켜낸 자랑스러운 역사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안타깝다.  

중국 정사에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는 대륙백제 기록과 우리의 정사 기록인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이제는 일제식민사관의 특을 벗어나 백제의 온전한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역사학계가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받아들여야 한다. 동성왕의 북위 전쟁 기록부터 되돌려놓자.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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