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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가치를 높여준 무령왕릉 지석

기사승인 2020.07.04  12: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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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초기기록불신론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정설로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말그대로 초기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부식이 허위로 창작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는 삼국사기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삼국에 관한 기술을 보면  건국자를 인정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고구려는 6대 태조왕, 백제는 8대 고이왕,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 사실상 건국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국사 교과서 뿐 아니라 실제 박물관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공주박물관의 백제 연대표 : 고이왕 이전에는 백제의 건국만 표시해놓고 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처음 창안해 낸 인물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다. 그는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硏究:1919)>의 부록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했다.

“(<삼국사기>에는)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일본)가 가야를 근거로 신라에 당도했다’라는 명백한 사건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 왜가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해야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일본서기는 맞고 삼국사기는 조작되었음을 주장한 것이다.

삼국사기 불신론을 불식시킨 무녕왕릉의 발견
.1970년대 공주에서 무녕왕릉이 발견됐다. 무령왕릉이란 것을 알게된 게 거기에 지석이 나왔는데 지석에 왕의 이름은 사마(斯麻)라고 적혀 있었다. 이 '사마'는 삼국사기에 무녕왕의 이름으로 나온다. 이를 통해서 사마가 무녕왕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사망 연대도 562년 5월이라고 지석에 나와 있는데 삼국사기에도 똑같이 562년 5월이라고 달까지 정확하게 나와 있다.

무녕왕릉 묘지석 iN 공주박물관

이렇게 해서 삼국사기가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무녕왕릉 발굴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6세기의 일이지만 삼국사기가 신뢰성을 회복함으로써 초기기록에 대한 신뢰도 사실 회복되어야 마땅하다. 중간기록은 맞고 초기기록은 다르게 썼다는 것은 역사서의 기술에 있어서도 말이 안되는 일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아직도 주류사학계는 버리지 않고 있다. 그에 맞게 임나일본부설의 유령도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박물관은 아직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맥을 같이 하는 원삼국론 즉 삼국이 AD3세까지는 원시삼국이었다는 용어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무녕왕릉 발굴 이후 수많은 초기기록을 신뢰할 수 있는 유물과 유적과 문헌 검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참고 기사] 식민사학의 잔재 ‘원삼국’ 용어는 폐기해야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57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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