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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의 삼균주의, 고조선 삼경제도서 힌트얻어

기사승인 2020.07.17  10: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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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소앙의 삼균주의 ← 고려사 신지비사 "수미균평위 흥방보태평" ← 단군조선 삼한관경제

 

조소앙 선생(1887∼1958)은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인 '민주공화국' 정신을 최초로 명시한 대한민국임시헌장 마련에 큰 역할을 한 사상가이다.

 민주공화국' 정신은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를 뿌리로 하고 있다.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에서 균등(평등)을 주창한 이론으로 개인·민족·국가의 균등(평등)을 강조한 사상이다. 조소앙 선생은 이 ‘삼균’의 대전제로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완전 평등을 내세웠다. 

삼균주의 정치사상은 좌우파 모두에게 수용됐다. 그래서 당시 좌파를 대표했던 약산 김원봉이 우파가 다수를 차지했던 임시정부에 참여 할 수 있었다. 즉 삼균주의 이념 하에 독립운동가들은 일치단결하여 항일전선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 = 충칭 1941.3.1. 삼일절 기념식 후 왼쪽부터 김구, 조소앙, 신익희, 김원봉. / 국가보훈처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1941년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토대와 기둥을 제공했다. 조소앙이 만든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은 원고지 10장 분량이다. 이 초안을 바탕으로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일부 수정을 거쳐 건국강령이 통과됐다. 

조소앙 선생이 주도한 [대한민국건국강령](1941)의 「총강」에서는 건국정신-삼균주의의 역사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의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선민(先民)이 명명한 바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하면 흥방보태평(興邦保泰平)하리라 (머리와 꼬리가 고르게 평등하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이 유지될 것이라) 하였다.  

이는 사회 각층 각계급의 지력(智力)과 권력(權力)과 부력(富力)의 향유를 균평(均平)하게 하며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太平)을 보유(保維)하라 함이니, 홍익인간과 이화세계하자는 우리민족이 지킬 바 최고공리임.”


조소앙은 자신의 삼균주의의 역사적ㆍ사상적 연원을 [신지비사]에 나오는 ‘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이라는 문귀에서 찾는다. [신지비사]는 단군시대의 사관으로 전해지는 신지가 썼다는 기록이다.  이 내용은 <고려사> 등에 일부가 전하고 있다. 

<고려사>를 보면 23세 고종(1213~1259) 때, 김위제라는 술수가術數家)가 평양으로의 천도를 주장하며 올린 상소문에서 <신지비사>라는 책의 서문이라고 밝혔다. 그 내용에 ‘수미균평위 흥방보태평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이 있다.
  
如秤錘極器 秤幹扶蘇樑 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여칭추극기 칭간소밀랑 추자오덕지 극기백아강 조항칠십국
賴德護神精 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 
뇌덕호신정 수미균평위 흥방보태평 약폐삼유지 왕업유흥륭

(또 신지비사에 말하기를) 저울추와 저울 그릇과 같도다. 저울대는 부소량, 저울추는 오덕지, 저울 그릇은 백아강이라70국이 조공하고 항복하리라.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지키고 머리와 꼬리가 균형이 잡혀 나란히 있고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보전하리라. 만약 삼유의 땅을 폐하면 왕업이 쇠하고 기울 것이니라 (하였으니 이는 저울로써 삼경(三京)을 비유함이라. 저울 그릇은 머리요 추는 꼬리요 저울대는 제강(提綱)의 곳이라......) 


고려사를 통해서 보면 고려 고종 때(13세기) 김위제가 [신지비사]를 인용하며 고조선 삼경(세 수도)을 언급하고 있다. 고조선은 삼경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 세 수도가 하나의 저울이 되어 균형을 이루고 태평했다고 전하며 고려도 삼경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고려는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경,동경,남경의 삼경을 두게 된다. 

조소앙 선생은 이 고려사에 나오는 신지비사에서 저울대,저울추,저울판에 해당하는 삼경(세 수도)의 균형에 큰 영감을 받게 된다. 

그런데 신지비사의 이 내용은 고려사를 직접 본 것일까?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신지비사를 통해서 삼한론을 전개한 신채호 선생의 저작을 통해서 이 내용을 알았을 가능성도 있다. 조소앙은 성균관부터 신채호와 오랜 동료였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신지비사>를 인용하며 '전후삼한론'을 편다.  1926년에 쓴  <전후삼한고> 책과 이후에 쓰여진 <조선상고사>를 보면 전삼한과 후삼한을 통해서 고조선이 삼조선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옛 조선을 개국한 초대 단군왕검은 삼신오제의 개념으로 국가이념을 삼아 신한, 불한, 말한의 삼한을 세우고 삼경을 두었음을 주장했다. 삼한은 한반도 남쪽의 삼한만이 아니라 그 전에 북삼한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삼한이 대륙삼한(북삼한)이고 이것이 후에 한반도 후삼한(남삼한)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금 역사학계가 인정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 남쪽의 삼한 뿐이다. 신채호 선생에 의해서 전후삼한론이 제기된 이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친일학자 이병도는 <삼한문제의 신고찰 1934∼1937 >을 썼고 이후 단재의 전후삼한론(삼한이동설)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 '전삼한'을 인정한 대표적인 학자는 신채호 선생 외에도 정인보, 안재홍, 최동, 문정창 등이 있다. 이 전후삼한론은 이후 『환단고기』가 세상에 드러남으로써 그 실체가 온전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환단고기』는 전후삼한과 맥락이 같은 '삼한관경제'가 바탕이 되어있다. 단군왕검은 신교의 삼신(三神) 원리와 삼신의 신성 속에 깃든 광명 원리를 근본으로 해서 단군조선의 전 영토를 삼한三韓(진한 ·번한·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은 마한,진한,변한이 있어 진한은 대단군이 직접 다스리고 마한과 변한은 부단군이 다스렸다. 이러한 고조선의 삼한관경제의 삼수 철학을 <신지비사>를 통해 얻은 조소앙 선생은 삼균주의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고조선 삼경을 환단고기 속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에서 조금씩 다른 명칭으로 기술하고 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결국 고조선의 삼경(세 수도)이 하나의 저울처럼 균형을 이루어 태평을 이루었듯이 정치·경제·교육 이 세가지가 균등을 이루어야 한다는 정치의 균등화, 경제의 균등화, 교육의 균등화를 주장한 것이다.  선생은 하나의 이념과 철학을 세움에 있어서도 이를 우리 역사 속에서 근거를 찾은 것이다. 

독립기념관의 삼균주의 비석 (출처 : 경기일보)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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