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영 선생.(사진=독립기념관 제공)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석영 선생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1855년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6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말기의 개화파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년 ∼ 1888년)에게 입양되어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임하려(林下廬)에서 살았다.
30세가 되던 1885년 과거에 급제한 그는 승지를 비롯한 요직을 지내며 고종을 보필하다 1904년 벼슬을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출처 : SBS 스페셜 |
일본이 나라를 빼앗자 이석영은 1910년 넷째 이회영(李會榮)의 건의에 따라 가곡리의 모든 땅과 재산을 처분하여 형 건영(健榮), 동생 철영(喆榮) 회영(會榮), 시영(始榮) 호영 등 6형제와 그의 가족들은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를 하였다. 일가권속 60여 명이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혈성으로 가문 차원에서 집단 망명한 것이다. 이 망명은 이석영의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6형제는 제일 먼저 한인 자치 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그리고 신흥 무관 학교의 전신인 신흥 강습소를 개소하였다. 물론 경학사·신흥무관학교의 창설 운영자금을 댔다. 본관과 사옥을 준공하고, 1913년 신흥 중학교로 개칭하고 군사반을 두었다. 1919년 신흥 무관 학교로 개칭하여 1920년 폐교 때까지 10년간 2,100명의 독립군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청산리 대첩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이 선생은 서간도를 떠나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전전하며 생활했다.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이석영은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녔다. 1930년 이회영이 상하이로 거처를 옮길 때 이석영도 상하이로 내려가 빈민가에서 지내다가 1934년 그곳에서 한 많은 80세 생을 마쳤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