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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인들의 의식주 생활은 어떠했을까?

기사승인 2020.08.07  13: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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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의식주

초대 단군왕검이 하백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 잠업(누에치기)을 관장하게 한 기록『( 단군세기』)으로 볼 때, 고조선 이전 배달 시대 때부터 한민족은 옷감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고고학적으로 북한과 만주의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양잠의 증거물로 보아도, 고조선은 상당한 직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조선 후기 유적인 중국 길림성 후석산猴石山 유적에서 출토된 방직기를 사용하여 짠 마포는 당시의 높은 직조 수준을 보여준다. 이 유적에서 또한 옷을 장식하던 청동 단추를 비롯한 여러 치장용품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조선 사람들이 옷을 만들어 단추도 달고 다양하게 치장하였음을 보여준다. 고조선에서는 삼베, 모직, 명주 등의 옷감이 생산되었다.

고조선의 바느질 솜씨

고조선 사람들의 바느질 솜씨는 상당히 꼼꼼했다.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호곡동 범의 구석 8호 집자리에서는 봇나무 껍질을 누빈 것이 발견되었다. 그 솜씨가 쇠바늘을 쓴 것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밀하였다. 

서포항 침통과 군곡리 뼈바늘>

   함경북도 서포항 유적의 고조선 문화층에서는 뼈로 만든 바늘통 안에 바늘들이 보관된 것이 출토되어 고조선 사람들이 바늘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옷을 장식하던 청동단추를 비롯한 치장용품이 발견되는데 당시 사람들이 단순한 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치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조선은 의복 제작기술이 발달해 있었고 길쌈하고 옷 짓는 것이 매우 중요한 생활의 일부였다.

『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부여 사람들은 흰색 옷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가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부여의 의복 문화를 말한 것이지만,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하였으므로 고조선의 복식도 이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복식 문화에서도 백색의 광명 사상을 중시한 한민족의 신교 문화를 느낄 수 있다.

고조선인들의 식생활과 주거 문화는 어떠하였을까?

평양시 남경유적에서 5천 년 전의 탄화미가 한 구덩이 안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이 벼의 종자는 현재 우리가 먹는 쌀과 같은 단립종短粒種이며 야생 벼가 아닌 재배종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은 고조선 이전부터 한반도 땅에 벼농사가 정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고조선 사람들은 벼 외에도 조, 기장, 콩, 팥, 피, 수수 등의 잡곡도 재배하였다. 또한 돼지·소·말·양·닭 등 집짐승도 기르고 사냥으로 산짐승을 잡아, 고기와 가죽을 이용하였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에서는 나무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였다. 고조선 시대 유적지에서 나무 외에 바리, 접시, 굽접시, 시루, 단지, 항아리 등 여러 가지 그릇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음을 말해준다.

고조선의 주거 문화에서 특히 눈여겨 볼 것은 한민족 고유의 난방시설인 온돌이 고조선 후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함북 웅기와 평북 강계, 자성, 영변 등의 당시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 형태가 확인되었다.

자료 출처 :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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