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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광개토태왕비문 신묘년조 해석

기사승인 2021.01.22  09: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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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학자나 일본학자의 인준을 받아야 할 문제는 아니다

최근 수년간 광개토태왕비문의 해석에 일본 해석의 손을 들어주는 젊은 강단 역사학도들의 막무가내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도올 김용옥 교수의 광개토태왕비문 내용 중 '신묘년조'에 대한 해석은 어떠한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도올의 중국일기3』  39쪽 ~ 50쪽의 광개토태왕비문 신묘년조에 대한 글 부분을 발췌하였다. 여기에서 도올은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공부를 깊게, 넓게 할지어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중국학자나 일본학자의 인준을 받아야 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주체적 이해방식을 우리의 보편적 사유 속에 융해시켜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건설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중국역사도 우리역사의 부분으로서 자유롭게 관망할 줄 알아야 하고, 일본역사도 우리 입장에서 우리역사의 일부로서 편입시켜야 한다. 저열한 스칼라십에 기만당하지말자 ! "라며 젊은이들이 크게 각성하기를 바라고 있다. 

출처 : 도올의 중국일기 3 (통나무 출판)

그러면 과연 "신묘년기사"라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 "신묘년기사"는 존재할 수가 없다. 신묘년은 호태왕이 등극한 해이며, 신묘년에 어떠한 일이 있었다면 (아버지 고국양왕은 신묘년 5월에 서거한다), 그것은 분명 호태왕이 왕위에 오르기 이전에 18세의 호방한 청년으로 가담한 전쟁이었을 것이다. 비문의 저자는 매우 문학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6년 기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 사건의 그 맥락에 닿아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6년 기사 앞에 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신묘년 " 운운하는 이야기는 독립된 기사가 아니고, 영락 6년에 있었던 백잔침공의 승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상기想起시킨 부속기사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독립된 신묘년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묘년에 있었던 사건이 영락 6년 병신년 기사의 부속기사로써 앞에 실려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묘년 운운하는 내용은, 오로지 광개토대왕이 영락 6년에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기위해 출정하였다는 사건의 명분을 정당화시키는 맥락적 의미를 갖는 부속기사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적 의미contextual meaning를 떠나서 이것을 독자적 정치적 사건으로 해석하는데에 모든 오류가 내재하는 것이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口口新羅,以為臣民。以六年丙申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오랫동안 우리에게 속해있던 백성이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조공하여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우리를 침략하여 왔다. 이에 우리 대왕께서는 바다건너 왜군을 격파시켜 버렸다. 그러자 백제는 다시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쳤고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왕께서는 영락 6년 병신년에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백잔국을 토벌하기에 이른 것이다 ......
 

나의 해석은 대체로 북한 학자 박시형의 해석과 일치하지만, 내가 박시형의 해석에 의존한 것은 아니다. 나는 박시형의 일본어번역본, 「광개토왕릉비』(전호천全浩天 역, 東京, 1985)를 뒤늦게 보았다. 박시형은 훌륭한 학자이다. 한국역사를 내재적 맥락에서 바르게 조망하는 풍요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다. 누구든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학의 에이비씨를 안다면, 그리고 이 기사의 맥락적 함의를 바로 본다면, 박시형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최초의 사례는 정인보 선생의 논문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호태왕의 치적을 찬양하는 비문이며, 호태왕은 항상 숨은 주어로 있을 수밖에 없다. 난데없이 왜가 주어가 되어 왜의 공적을 나타내는 행위가 기술될 리가 없다.

우선 “백잔신라百殘新羅 , 구시속민舊是屬民, 유래조공由來朝貢이라는 첫구절의 대전제에 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 구절을 以辛卯年來渡海破百選, □□新羅, 以爲  '라는 식으로 구두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석될 것이다: "왜가 신묘년에 와 바다를 건너 백잔을 파하고 또 신라까지 파해서 양국을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이것이 소위  고대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설의 원형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소기하는 바 6년 기사는 논리적으로 왜倭를 쳐야지, 어찌하여 백제를 치는가? 우선 래來와 도渡 두개의 동사가 중첩되는 것은 도무지 이상한 일이다. 

 “래來"는 "래침來侵"의 의미를 갖는 중후한 본동사이지 허사일수가 없다. 도해파의 주어가 호태왕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문장 중간에 왜 갑자기 주어가 바뀌냐고 반문하겠지만 , 이토록 압축된 비문의 문장내에서는 그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본 비문내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얼마든지 발견된다. 

“不樂世位,因遭黃龍來下迎王。”

앞의 문장의 주어는 추모왕이다. 추모왕이 세위世位를 즐겨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연접되는 "견"의 주어는 천제이다. 황룡을 보낸 것은 천제이지, 주몽이 아니다. 그 다음 문장에 보면 주어가 맥락에 따라 바뀌는 습관은

이 문장을 쓴 사람의 특성이다.

“王於 忽本東岡黃龍負昇天,”

많은 사람이 이 문장을 왕을 주어로 하여 연속되는 것처럼 해석한다. “왕께서 홀본동강에서 황룡을 업고 하늘에 오르시었다." 그러나 한문에서 "부負" 라는 동사의 목적이 앞으로 오는 것이 극히 부자연스럽다. 황룡 이하의 문장은 황룡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앞 문장의 주어가 뒷 문장으로 연속 되지 않고 뒷 문장의 주어는 황룡으로 바뀐 것이다. “왕께서는 홀본동강에 계시었다. 그때 황룡이 그를 업고 하늘에 올랐다. 승천의 주어도 황룡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어가 바뀌는 것은 이 비문의 특성이다.

또 "래도來度”의 의미를 박약하게 하기 위하여 “래來'를 앞으로 붙여 읽는 기묘한 수법을 왕지엔천王健群은 고안한다. 왜를 주어로 하고 “이신묘년래以辛卯年來"는 "신묘년이래辛卯年以來"라는 것이다. "신묘년 이래로 줄곧"의 의미라는 것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 같은 비문내에서 그 해에 일어난 사건을 쓸 때 "이갑인년구월以甲寅年九月”이라하여 “이”라는 전치사가 독자적으로 쓰였다. "In that year "와 같은 식으로 그러면 래來는 "래침하였다"라는 동사가 될 수밖에 없다. 왕지엔천은 일본학자들의 독법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하면서, "이위신민以爲民"은 잠깐 점령했다는 뜻이지 임나부의 근거는 될 수 없다고 아주 크게 선심을 쓰는 듯이 이야기 한다.

"동북공정"은 이러한 방식으로 중국학자들의 의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평심하게 생각해보라 ! 과연 무엇이 자연스러운 해석인가? 왕 지엔췬은 고어법의 기본애 충실해야 할 것이다. 일본학자들이 심중에 품고 있는 연역적 전제, 그것으로 인해 파생된 1세기 동안의 무의식적 세뇌의 담론을 우선 간파해야 한다. 일본군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동아시아 디스꾸르의 실상을 통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비문은 대체적으로 백제와 왜의 세력이 연합하여 신라를 괴롭힌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호태왕이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을 계속 괴멸시킴으로써 신라라는 남南의 거점을 확보하는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박시형이나 나의 해석은 이 비문 전체의 흐름에 따른 가장 자연스러운 맥락적 해석contextual interpretation인 것이다.

더 이상 나는 구차스러운 언사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일본인이 주장하는 바 가장 신뢰 가능한 모든 탁본의 성과를 종합하여도 일본학자들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명백한 전체 맥락의 사실을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것이 정도正道일 뿐이다. "석회도말작전은 불행한 사실이나 그 사태를 빙자하여 몇 글자를 바꾸어 어색하게 해석한다고 해서 호태왕 시대의 역사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구미에 맞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항상 전체를 볼 줄 알게 되면 부분의 악은 사라진다. 부분만 고집하는 것이 인간의 무명無明이다.

이러한 과제상황을 다루는 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기초적인 스칼라십이 대체로 열악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공부를 깊게, 넓게 할지어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중국학자나 일본학자의 인준을 받아야 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주체적 이해방식을 우리의 보편적 사유 속에 융해시켜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건설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중국역사도 우리역사의 부분으로써 자유롭게 관망할 줄 알아야 하고, 일본역사도 우리 입장에서 우리역사의 일부로써 편입시켜야 한다. 저열한 스칼라십에 기만당하지말자 ! 

 

광개토태왕릉을 올라가고 있는 도올 김용옥 선생, 사진 출처 : 도올의 중국일기 3 (통나무)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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