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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한국통사] 고구려 모본왕 때 산서성 태원까지 공격했다는 의미는?

기사승인 2021.03.21  13: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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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영상 : May 3, 2020 https://youtu.be/XhYq8ncu5cw

이번엔 고구려 초기사 중에서 고구려가 건국할 때 도읍이 어디였는가 라는 부분과 고구려 강역에 관해서 짧게 한번 살펴보겠는데요. 

처음에 고구려 도읍을 기록에는 홀승골성 이렇게 나와 있는데 홀승골성이 어디냐 라고 하면 지금은 전부 다 중국의 압록강 조금 넘어가면 환인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을 가지고 고구려 초기 도읍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오녀산성 여러 번 올라가봤는데요 상당히 가파르죠 약 해발 800미터 쯤 되는 가파른 산 위에 있는데 가보면 사실 기록에 그런 기록들이 있지 않습니까 한 선비가 길목을 지키면 수만명을 막아낼 수 있다라고 하는 올라가보면 실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 하나밖에 없어요 거기만 막으면 수만명이 아니라 100만명이 와도 올라오기가 힘든 그런 지역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그런데 문제는 누가 여기를 처음에 고구려 도읍지라고 결정을 했는지 그런데 이 지역에서 막상 그렇게 가파른데 올라가보면 약 60만평에 달하는 평지가 있어요. 특이한 그런 성인데 또 우리나라 성들은 올라가보면 반드시 뭐가 있냐면 우물이나 흐르는 계곡물이 있어요. 그래야 물이 있어야 오해 항전하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나라 산성들은 우물이나 계곡물이 있는데 거기에 우물들이 많이 있어요. 

문제는 오녀산성에서는 BC 1세기 때 유물은 전혀 출토가 안된다는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2대 유리왕이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게 되죠.  그래서 그 국내성을 집안이라고 바로 압록강 그 맞은 편에 있는 집안이라고 설정하고 있는데 집안을 가보면 지금도 시내에 성벽들이 일정 부분 남아 있습니다. 배후에는 산성이 있는데 그 산성을 환도산성이라고들 해석을 하죠. 

우리나라 성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할 것 없이 평지에는 나성이 있고 산에는 반드시 산성이 있어요. 우리나라는 전투하는 방식이 중국이나 뭐 저쪽 일본하고는 좀 달라요. 우리는 전 백성이 함께 하는 겁니다. 나성에서 싸우다가 나성이 함락되게 되면 그 이전에 모든 물자를 산성에 다 옮겨 놓죠. 그래서 산성에서 식량하고 물 많이 쓰면 오래 항전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나라 고대 전쟁할 때 기본 축성 방식인데요.  나중에 나성이 빼앗기게 되면 전부다 물자를 옮겨놓고 나머지는 다 불태워버리죠. 불태운다고 해서 청야전법이라고 하는건데요 이 집안에 들어가보면 실제로 평지에 성벽이 있고 배후,산에도 거대한 산성이 있습니다.  

여기도 물론 서기 3세기에 국내성으로 천도하기 때문에 시내에 성이나 산성에.. 그러니까 1세기 때 유물 유적들이 나와야 되는데 그것도 전부 다 학자들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만 2세기 후반이후나 이때로 이야기하지 1세기 때 유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항상 역사를 볼 때 저도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누가 환인에 오녀산성에 올라갔을 때 이게 고구려 초기 도읍지인 홀승골성이다라고 말하면 아 이유가 있겠지 근거가 있으니까 맞겠지 하면서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공부를 조금 더 하다 보니까 이건 누가 이렇게 정했지 이게 맞는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죠. 

그래서 그 의문을 찾아가는 것이 사실은 역사공부의 요체고 역사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은 의문을 가지고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의문을 가지고 바라보면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는 부분이 있는 반면에 공부하면 할수록 의문이 생기는 많은 부분들이 있죠. 그럴 경우에는 자기가 판단 정지를 하고 더이상 따르지 말고 내가 한번 찾아보자라고 해서 자기관점을 찾아보는게 중요하죠.

그래서 이 경우에는 그러면 어떻게 찾을거냐 사료를 가지고 찾아봐야 되는데 

고구려 모본왕 2년에 서기 49년도 기록인데요 아주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어요. 모본왕이 장수를 보내가지고 북평,어양,상곡,태원을 공격했다라고 하는 기록입니다북평,어양,상곡,태원... 북평,어양,상곡 이 세 지역은 대부분 북경 주변이에요. 그 다음에 태원은 북경보다도 훨씬 더 서쪽인 산서성의 지금도 성도인 태원이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의문이 생기는게 고구려의 수도가 지금의 길림성이라고 그러면 거기까지는 너무 너무 멉니다. 거기까지 갈 이유도 없어요. 사실은

전쟁은 정치의 가장 첨예한 수단이 전쟁이라고 말하고 또 경제 획득에 가장 최전선의 수단이 전쟁이라고 말하는데 정치적 경제적으로 뭔가 이득이 있어야 전쟁하는건데 저기 길림성에 집안이나 뭐 환인에서 지금의 산서성 태원까지 그 비싼 돈들이고 갈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이 기록은 후한서에도 나옵니다. 후한서에는 단지 공격햇던 사람을 맥인들, 우리가 예맥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맥인들이 똑같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공격했다 우북평 뭐 이렇게 나오기도 하는데 그때 같은 지역을 공격한 기사가 나와요. 

그러면 삼국사기에도 이 기사가 나오고 후한서에도 같은 내용의 기사가 나오면 고구려가 이때 지금의 북경지역, 산서성 태원을 공격한 것은 사실이라고 봐야죠 

이게 또 사실인 이유는 뭐냐면 그 후에 6년 후에 그때가 태조왕 3년 기록인데요. 이때 보면은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가지고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야기는 뭐냐면 이 당시에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서 한나라 침략에 대비했다라고 하는 건 뭐냐면 고구려가 성을 쌓았다는 거는 자기네 영토라는거죠. 그래서 영토를 지켰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요서는 지금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은 요녕성 요하를 기준으로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라고 하는데 이 당시에 요서는 기준이 그쪽이 아니에요. 

이 당시에 요동이 어디냐면 예를 들어 사기에 보면은 서초패왕 항우가 자기 부하들을 여기저기 왕으로 봉해주는데 그 중에 요동왕으로 장도라는 사람을 봉해주죠. 요동왕 장도가 당시 요동의 수도 무종이라는 곳으로 가는데 그 무종이 어디냐면 지금의 천진 산하에 있는데예요. 요동왕 무종의 수도가 지금의 천진 부근이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천진 지역이 고대의 요동이라는 걸 알 수가 있고 요서는 그거보다는 더 서쪽으로 찾아야 된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게 되는건데요. 

이 삼국사기 기록에 연속성이 있어요 . 서기 49년 모본왕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공격했다라고 하고 태조왕이 6년 후에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서 한나라 침략에 대비했다라고 하는거니까 

이때 요서가 어딘가 정확히 어딘가는 약간의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고구려가 최소한 거기까지 산서성 태원까지 공격할 때는 거기에서부터 북경과 산서성 태원을 공격할 때는 그쪽에서 크게 멀지 않은 지역에 있었으니까 거기까지 공격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은 딱 여기서만 끝나는게 아니에요. 우리는 지금 국사교과서를 보면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라고 해놓고 지도 그려 놓은 것을 보면 이게 무슨 전성기인가 지금 요하를 넘지 못한 걸로 해놓고 말은 전성기 대륙국가 라고 해놓고 해보면 그 조금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죠.  이것도 전부 다 고대의 요동을 지금의 요동으로 설정해놓고 거기에 다 꽤 맞추는 겁니다. 

원조 찾아보면 전부 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 축소한 것 지금까지 따라서 하는거죠 그러면 무조건 일본인들이 했으니까 틀렸다고 할거는 아닌거죠. 역사는 근거를 제시해야 됩니다.

그럼 근거들이 이제 여러 개가 있는데 먼저 수서, 수나라하고 고구려가 전쟁을 하지 않습니까 수서에 배구 열전이라는 배구란 사람의 열전에 있는데 배구라는 사람이 수양제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고구려는 원래 고죽국의 땅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고죽국은 사마천이 사기열전에서 가장 첫 번째로 쓴 사람이 백이숙제죠. 백이숙제 다 동이족이예요. 백이숙제가 다 고죽국의 왕자들입니다. 고죽국의 나라다 말하고 있는데 지금 중국 학계에서 고죽국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이라고 봐요. 

저희가 그쪽 지역을 제가 여러번 답사했는데 지금도 하북성 노령에 가 보면 백이숙제의 비석이 있고 묘가 있고 우물이 있고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실제 백이숙제가 먹던 우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뭐 그 사건은 BC 12세기때 사건이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거의 3천년도 더 지난 사건이기 때문에 정확히 맞다라고 지금 단정할 순 없지만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고죽국의 위치를 하북성 노령현 일대로 보고 있다는거죠.

그런데 이 기사는 수서에만 나오는게 아니라 당나라 때 두우라는 학자가 통전이라는 역사서를 쓰는데 여기에는 머라고 나오냐면 진나라,진나라는 진시황의 진 나라가 아니라 위촉오 삼국시대가 결국은 위나라에서 나온 사마의 집안이 세운 진나라가 통일하는 걸로 끝나는데 사마의 집안의 진나라를 뜻하는건데요. 진나라의 평주라는 곳이 있는데 그 평주가 바로 고구려의 도읍지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평주가 어디냐 여기도 화북성 노룡현을 뜻하는거에요. 여기에 바로 옛날 은나라 시대의 고죽국이 있었다. 통전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중국 학자들이 상당히 일관성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라는 걸 알 수가 있는 건데요. 

그러니까 고죽국까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까지가 여기도 고조선의 땅이었다라고 중국 고대 기록들에 여러 개가 나온다라고 하는거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 그려 놓고 있는 것은 훨씬 더 서쪽으로 최소한 지금의 화북성 노령현까지는 연장시켜서 교과서에 그려야 한다라는 걸 알수가 있는 겁니다.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송나라 때 태평환우기라는 책이 있는데 약사라는 사람이 쓴 태평환우기라는 책에서 뭐냐면 여기에는 노룡현, 바로 하북성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었다라고 말하는데 이 조선성이 어디에 있냐면 낙랑군 조선현을 뜻하는거예요. 이 기사가 여러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계승하고 있는 남한의 강단사학계는 낙랑군을 평양이라고 말하지만 중국 기록들은 지금의 화북성 노룡현 이라고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머냐면 수나라하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군사들이 총 집결하는 곳이 있어요. 전쟁하기 전에 군사를 총 모아서 집결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가 어디냐면 탁군이라는 곳입니다. 탁군, 탁군이 어디냐면 지금 북경에서 북경 남쪽에 있어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고구려의 서쪽 강역을 현재 요녕성 요하로 보면은 북경 남쪽 탁군에서 요하까지 가다가 군사들이 다 지쳐가지고 막상 국경왔을 때는 힘 빠져서 전쟁을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가는 거는 없는겁니다.

예를 들어서 남북이 전쟁을 한다라고 치더라도 우리가 지금 휴전선 부근에 약 150만명이 양쪽에 남한군하고 북한군이 대체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남북이 전쟁한다라고 하면은 남한 군사가 의정부 쯤에 모여가지고 공격하게 되어있지 저 대구나 부산에 모여가지고 공격할리는 없는거죠. 그것도 뭐 공군도 아니고 육군인데  그러니까 이때 보면은 이 군사들이 수나라 당나라 군사들이 북경 남쪽에 탁군에 모여가지고 고구려 침공한다라고 하는 사실은 북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까지가 고구려 강역이었다라고 하는 걸 알수가 있고 

제가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에 여러 사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잇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초기 고구려의 도읍지가 어디냐 라고 하는 부분은 여러 사료를 다 살펴봐도 환인이라든지 그 다음에 국내성 집안이라든지 하는 이야기는 전혀 설득력이 없고 중국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 고구려 건국 당시 도읍지는 지금보다 상당히 서쪽으로 와서 설정을 해야 여러 우리 삼국사기를 비롯해서 중국의 여러 기록들과 부합한다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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