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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 제52주기 추모식 열려

기사승인 2021.04.13  00: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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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

-승려 신분으로 만세운동 주도⋅평생을 항일 투쟁

승려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생을 항일 투쟁에 헌신한 「운암 김성숙 선생 제52주기 추모제」가 12일(월) 오전 11시에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서 개최됐다.

이번 행사는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 주관으로 진행됐으며, 코로나19 방역지침을 준수하여 운암 김성숙 선생의 유족 및 각계 인사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특히 추모제는 승려 출신인 김성숙 선생(태허 스님)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능화 스님의 불교 추모 의식과 팝페라 그룹 ‘듀오아임’의 추모곡(‘해후’, ‘아리랑 아라리요’)을 헌정하는 시간도 가졌다.

태허스님 52주기 추모식 (사진출처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한편,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 등을 역임하면서 항일 투쟁에 헌신했으며, 운암 김성숙 선생(1898.3.10.~1969.4.12.)은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출생하고 19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됐다.

1919년 3월 경기도 남양주군 봉선사의 승려로 있을 때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라는 명의로 동료들과 함께 격문을 만들어 인근 동리에 살포한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조선무산자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다.

선생은 1923년 초 일경의 탄압이 심해지자 승려 5명과 함께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민국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사회주의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한인 유학생사회에서 이름을 떨쳤다.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1935년 12월 12일 김성숙 선생과 두쥔훼이 부부는「상하이 문화계 구국운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생은 상하이 여성구국회에도 가입하여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했다.

1944년 4월 24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장건상·박찬익·조소앙·성주식·김붕준·유림·김원봉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선생은 충칭 임시정부시기 한·중 연대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1942년 10월 11일 열린 중한문화협회 성립대회에서 이사로, 10월 17일에는 선전조 부주임으로, 1945년 3월 15일에는 한국구제총회의 감사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로 들어와 근로인민당 결성 등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4월 12일 ‘피우정’에서 서거했으며,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병락 군사전문기자 byunglak169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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