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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야건국과 왕조를 다룬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불신하는가? 

기사승인 2021.08.30  22: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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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학계라면  『삼국사기』,『삼국유사』를 우선시 해야한다. 우리의 역사를 우리 주체적으로 적은 역사서이다. 충분히 신뢰할만한 사서임에 분명하다.

『일본서기』를 전적으로 신뢰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만든 것은 일본학계이다.  그러면 우리는 『삼국사기』,『삼국유사』를 우선으로 하며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맞고 틀리고를 결정하면 될일인데 오히려 우리 학계는 『일본서기』를 기반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불신하고 『삼국유사』를 불신하고 있다. 

이를 고려시대 저작이어서 『일본서기』보다 연대가 늦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고려해서 최고의 결정을 해야 하는 학자로서의 태도가 아니다. 고려시대의 저작도 그 이전의 사서를 인용하여서 기록하고 있으며 엄정한 사료검증을 통해서 인용한 것임을 사서를 통해서 알수 있다. 게다가 백제 무열왕릉에서 발굴된 기록과의 비교 등을 통해 『삼국사기』의 기록이 신뢰성이 있음이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만든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틀과 프레임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가야의 건국이 AD 42년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는 " 김유신(金庾信)은 (신라의) 서울 사람[王京人]이었다. 그 12대 조상인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9세손인 구해(仇亥; 또는 구차휴(仇次休))에 이르렀으니, 유신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있다. 

그런데도 이를 허구라고 하는 것이 우리 학계다. 교과서에도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 연대는 적어도 가야의 건국 연대는 적지 않는다 (2021년 교과서) 

창원 다호리 유적 등 BCE 1세기의 유물,유적 등이 나와있고 허황후의 행적,기록,문헌,유물 등이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음에도  AD 42년의 가야 건국이나 6년뒤의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결혼이 허구와 상상이라고 주장한다. 

국립중앙박물관 2019년 가야본성 특별전시에서 바닥에 가야건국 부분은 신화 파트라고 적어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 특별전시 가야의 지배자 설명글

그러면서 금관가야의 건국 연대를 3세기~ 4세기로 늦추어버린다. 3세기말이나 4세기부터 금관가야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역사학계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원이 무엇인가? 쓰다소키치와 같은 일제관변학자,일제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계승 답습한것 아닌가? 

가야는 52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이를 복원하지 못하는 학계는 철저한 반성으로 거듭나야한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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