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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가야실에 김수로왕이 돌아왔다.

기사승인 2022.09.22  15: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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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가야실에 가야건국의 주인공 김수로왕이 돌아왔다. 

2021년 12월 가야실이 리모델링되어 재오픈되었을 때 가야사 연표에서 가야 건국시조, 건국의 주체 김수로왕이 빠졌었다. 이는 주류역사학계가 김수로왕을 실존인물로 인정하지 않고 상상과 허구의 인물로 보기 때문에 빼버린 것으로 추정되었고  이는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실 가야연표가 다시 수정되었다. (9월 22일 현재)

그중에서도 김해김씨 문중의 경우에는 수백만 김해김씨의 뿌리 조상이 부정당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에 이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해김씨 문중은 각 지역마다 플랭카드를 걸고 가야사 왜곡에 항의했다.

9월 20일 국회 국정질의에서 민홍철 의원은 한덕수 총리에게  왜곡된 가야사 문제에 대한 질의를 하였다.

민 의원은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사 연표가 상당히 왜곡되어있습니다. 2021년 이전에는 서기 42년 수로왕 즉위했고 가야가 건국되었다라고 표기되었는데 지금은 수로왕 즉위도 삭제되었고 가야가 성립되었다고 표현이 바뀌었어요. ...시정 조치를 취해주시구요. "라고 하였고 이에 대해 한덕수 총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늘 조치중에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2021년 말까지의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사연표(좌측) 와 2021년 12월 바꾸었던 가야사 연표(우측)

그러니까 국립중앙박물관은 9월 20일에 국정질의 시점이 되어서 가야실 가야사연표의 항의받은 부분을 수정한 것이다. 이에 필자는 이틀지난 22일 직접 국립중앙박물관을 가서 무엇이 바뀌었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일단 '가야 성립'은 그대로 두었고 그 아래에 "수로왕 즉위,금관가야 건국"이라고 써놓았다. 그리고 가로 안에 삼국유사라고 해놓았다. 가야 건국의 주체 수로왕이 돌아온 것이다. 금관가야 건국이라고 써 있지만 실제적으로 가야가 이때 건국한 것이다. 상식적인 일임에도 이렇게 돌아오는데 거의 1년이 걸렸다. 그것도 국회에서 나서야 한다는 점에서 씁쓸함은 아직 남아 있다. 

삼국유사라는 출처 표기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이는 고구려,백제 연표도 같은 문제이기도 한데 건국연대에만 출처를 표기한 것은 "삼국유사에는 그렇게 적혀 있는데 우리 학계는 이를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숨은 뜻이 담겨져 있다. 아니면 모든 사건에 출처 표기를 해야 한다.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도 주몽의 고구려 건국도 출처 표기를 하게 되면 이는 거기에 는 적혀있지만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가야건국은 <삼국유사>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 시기인 <삼국사기>에도 나와 있는 내용인데 이런 사실 조차 왜곡하고 있다. 

김수로왕이 서기 42년 가야를 건국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 』 「가락국기」(1281년)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1145년)에 동시에 나온다. 삼국사기로 본다면 130년이상 더 빠른 기록에도 똑같은 건국 연대가 나오는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을 보자 

김유신(金庾信)은 (신라의) 서울 사람[王京人]이었다. 그 12대 조상인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9세손인 구해(仇亥; 또는 구차휴(仇次休))에 이르렀으니, 유신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서기 42년에 나라를 열고 가야라고 하였다. 이보다 명확한 기록이 어디 있는가? 

어찌되었든 국립중앙박물관은 가야 건국의 주체인 김수로왕을 다시 기록했다이런 내용은 항의를 받는다고 바꾸는게 아니다. 실제로 맞는 부분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잘못한 부분이기 때문에 수정을 하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번 수정을 계기로 국민들의 두 눈이 준엄하게 역사를 바라보고 있음을 직시하고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고 알리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9월 20일 수정된 것으로 보이는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실 가야사 연표 : 김수로왕이 다시 등장했고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했던 아라가야 멸망 연대 (561년)가 삭제되었다. 

561년 아라가야 멸망 연대도 삭제되었다.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 가야 연표중 아라가야 멸망 시기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바 있다. 

아라가야가 561년에 멸망했다는 것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이며 그 기록으로 인한 추정연대이다. 일본서기 561년조의 기록을 보고서 아라가야가 561년에 멸망했다고 한 것이다. 

"신라는 아라(阿羅)의 파사산(波斯山)에 성을 쌓고서 일본에 대비하였다." 『일본서기』 561년

즉 561년에는 신라가 안라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므로 561년에 멸망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멸망했다는 기록이 아니다. 그러므로 561년에 멸망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아라가야 멸망에 대해서는 수많은 국내 문헌에서 신라 법흥왕 시기(514∼540)에 멸망했다고 전하고 있다. 법흥왕은 540년까지다. 540년 이전에 아라가야(아시량국)은 멸망했다. 

[삼국사기],[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함안군읍지],『동국통감』,『동사강목』,『대동지지』는 모두 신라 법흥왕 재위 내에 아라가야가 멸망했다고 나오며 대략 538년으로 특정하고 있다. 즉 모든 국내문헌은 아라가야가 신라 법흥왕 시기에 멸망했음을 명명백백하게 적었다

이에 대해서 <식민사관 청산 가야사 전국연대> 등 여러 단체에서 항의를 한바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아라가야 멸망 시기에 대해서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였다.  사실 이 부분의 삭제는 1년만이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개설 이래 쭈욱 가야사 연표에 적혀 있었던 아라가야 멸망연대 561년이 삭제 된 것이다. 

 

그동안 쭈욱 아라가야 멸망연대는 561년으로 기록되어왔다. 이번에 9월 20일 삭제되었다.

아라가야의 멸망연대가 법흥왕 시기였음은 문헌상 명백하다.  아라가야는 이미 멸망했음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안라'는 일본열도에 있는 또 다른 정치체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일본열도 속 '안라'를 버려야 한다. 안라는 아라가야가 아니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사 연표의 수정은 의미하는바가 크다. 가야 건국의 인정에 한발짝 다가섰으며 임나일본부설을 밀어주고 있던 안라 멸망시기가 빠짐으로해서 앞으로 가야의 역사 복원에 아주 조금 다가갔다고 볼 수 있다. 

아직 갈길이 멀다. 교과서에도 가야 왕 연표는 들어가지 않는다. 가야 건국 연도도 거의 대부분 빠져 있다. 이런 것들이 함께 복원되어야 가야사가 온전히 복원될 것이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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