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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1879.7.10~1962.5.10) 서거일

기사승인 2018.05.10  1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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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선비, 성균관 대학교 창립자

 

"나라가 곧 망하겠다. 지금 문을 닫고 글만 읽을 때가 아니다. 성현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모르면 가짜 선비니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성균관 대학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학인데요. 조선시대 유교 교육과 확산의 진원지였던 성균관은 선비정신을 이어온 김창숙 선생에 의해 1946년 성균관대학교로 재건되어 현재까지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 김창숙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선생은 경상북도 영남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자의 길을 걸어오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급히 올라와 매국노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목숨을 걸고 올렸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1906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선생은 전국단연동맹 성주지역대표로 활동하며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으나 일제의 방해가 계속되자 방법을 바꿔 1909년 사립학교인 성명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거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안타깝게도 선생의 어머니가 병환으로 생사를 헤매어 조선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선생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는데 그 이유가 민족대표 그룹에 천도교, 불교, 기독교는 있는데 민족종교였던 유교, 유림계열의 지도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 때문이었죠.

그 후 선생은 전국 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을 한데 모았고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유림단 진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한 독립생존의 원리에 비추고, 또 강화회의에서 실현코자 하는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

김창숙 선생은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 후 인쇄하여 우편으로 보내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면서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내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세계만방에 알렸습니다.

그 후 같은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상도 지역 의원이 되었는데 이때 쑨원, 이문치 등 중국 인사들과 만나 ‘한국독립후원회’와 ‘한중호조회’를 결성하여 만주와 몽골 등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선생은 학생들의 교육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으며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26년에는 이동녕, 김구 선생등과 함께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해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한 사건을 비롯해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했습니다.

국민들의 독립 정신에 혼을 불어넣자.” 그 후 1920년 국내로 귀구하자마자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선생은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민족정신과 애국심은 전혀 꺽이지 않았고 출옥 후 곧바로 중국으로 돌아간후 신채호, 박은신 선생등과 <천고> <사민일보> 등을 발간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고, 서로군정서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쑨원과 교섭하여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아내었습니다.

그 후 1923년 의열 활동을 위해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의미의 ‘다물단’을 조직하였고,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다시 한 번 수감생활을 하게 됩니다. 일제말기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어 1945년 8월 경찰서에 구속 중, 광복을 맞았습니다.

8.15 광복후, 초창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민족주의계열에서 정치활동 했었고.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듬해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민주의원 구성內 친일파, 한민당 세력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바로 비난성명서 내고 민주의원 직을 거부했습니다.

6.25 전쟁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 김성수, 조병옥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였고, 1959년 국가보안법 개악 당시 망국의 법이라고 강력히 비난했었다. 선생의 이러한 반독재 민주화운동 행보는 독재권력비호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습니다.

1952년 6월 이승만의 개헌안에 반대하는 시위도중 테러를 당한 선생을 강제 체포하는 장면 이후 정치활동 일선에서 물러나 유림계로 복귀, 유도회를 조직하고 회장 및 성균관장을 역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억압되었던 성균관을 계승하는 취지로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습니다. 지금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와 자연과학캠퍼스에는 각각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동상이 건립되어 있으며 성균관대학교 학내 언론 중 하나인 ‘성균지’에서는 그를 기리는, 심산 문학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하는 잊혀진 영웅중 한 분입니다.

 

“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 - 故 김수환 추기경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자료 제공 : 정상규의 독립운동가 어플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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