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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운동가 이 회영 선생(1867.3.17~1932.11.17) 서거일

기사승인 2018.11.17  09: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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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 타파부터, 항일투쟁까지, 집도 몸도 넋도 모두 조국에

 


"이보게 뱃사공, 내 이 돈을 전부 줄테니 한가지 부탁을 하세, 앞으로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이 강을 건너올걸세, 그때 그들을 잘 부탁하네"

독립운동사를 통틀어 몇 가지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이는 사례들이 있는데 이회영 선생은 아마 그 중 대표적인 경우로 일컬어질 것입니다. 전세계 어떤 역사를 보더라도 높은 신분에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한 가문이 전 재산을 나라를 위해 사용하다 정작 본인들은 굶어 죽는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항복 선생의 11대 후손이고 조선 말 10대 부자 안에 들었던 집안의 이회영 선생은 전형적인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으며 기득권을 버리고 지배층으로서 그에 걸맞은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실현한 집안입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이완용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6형제중 5형제가 순국하였으며 전재산 급매 600억(소 13,000마리), 실제가치 2조에 해당하는 전 재산을 투자하여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이곳에서 3500명의 독립군 간부를 길러냈으며 이들의 모든 학비와 식비를 전액 무료로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이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갈 때 그곳의 뱃사공에게 거금을 주며 앞으로 이 강은 역사적인 장소가 될 것이며 조선의 수많은 청년들이 뜻을 품고 이 강을 건널 때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1910년. 우리는 나를 일본에게 완전히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어버립니다. 선생과 그의 6형제들은 서로 모여 나라의 국운에 대해 상의를 하러 모입니다. 그리고 이 모임에서 그들은 만장일치로 전 재산을 투자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쓰기로 결심합니다. 6형제 그 누구도 이러한 결심에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2조의 돈을 전부 사용한다. 과연 여러분이라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선생과 그의 형제들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며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하루에 죽 한 끼조차 먹기 힘든 상황이 됩니다.

6형제중 첫째인 이건영 선생의 둘째 아들은 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사망했고 셋째 아들은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다 공군 대위로 복무중 6.25 전쟁때 실종되었으며 가장 재산이 많았던 둘째 이석영 선생은(동대문구, 중남구, 구리시, 남양 전체가 선생의 땅) 신흥무관학교와 경학사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생활비를 자신의 전 재산으로 지원하다 상해에서 굶어 죽었으며, 이석영 선생의 장남은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성공 후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20대 나이에 사망했으며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셋째 이철영 선생은 영양실조로 인한 지병으로 사망했고, 넷째였던 이회영 선생의 셋째 아들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3년간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만주와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섯째 이호영 선생은 두 아들과 함께 실종되었으며 6형제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이시영 선생만이 그 유지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시영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광복 후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하여 부통령직을 사임하였고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가문의 명예를 지켰습니다.

다시 이회영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1920년대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고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있었는데 이회영 선생은 높은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원칙을 외치는 무정부주의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임시정부 같은 정부조직이 생기면 대통령, 국무총리, 의원이라는 자리를 놓고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파벌이나 싸움이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예상대로 실제 역사는 흘러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선생은 1932년 66세가 되던 해에 밀고자에 의해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셨는데 이미 영양실조상태까지 간 망가진 몸에 일제의 고문은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사람이었는데 그 고문이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선생은 광복을 보지 못하고 고문에 의해 옥중 순국하셨습니다. 고통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고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생과 사는 다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 자료 제공 : 정상규의 독립운동가 어플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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