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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의 위상 - 단정반대, 미군정경찰에 쫓겨

기사승인 2019.11.03  11: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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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현대사 연구가)
前 독립기념관 관장

 

망명 28년 만에 환국한 김원봉에게 분단된 조국은 ‘해방조국’이 아니었다. 미군정하에서 1946년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정국의 갈림길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좌우합작운동이 거세게 제기되었다.

 

이승만과 김원봉, 사진출처=조선일보 기사 화면 캡처

 

일부 우파와 중도파 좌익세력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우익세력의 단독정부 수립계획이 본격화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군정은 초기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반탁을 주장하는 극우세력을 배제하고 중간파 중심으로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려는 구상 하에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쪽으로 전환됨에 따라 좌우합작운동은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김원봉은 줄곧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며 1948년에는 남북협상대표의 일원으로 방북 길에 오른다. 김원봉은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비판하면서 좌우합작 ․ 통일정부수립의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합작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김규식과 자주 만나고, 이를 지원하기도 했다.

민족혁명당은 1947년 6월에 열린 제10차 전당대회에서 당명을 인민공화당으로 변경하고, 신탁통치 지지라는 정치노선을 확정하며 김원봉은 당대표 직을 맡았다.

인민공화당의 주요 정치노선은, 각지 인민조직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ㆍ무상분배, 노동자ㆍ농민에 대한 선전활동 강화, 민전에 대한 지지 등이었다.

이해 7월 19일 해방정국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인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민전의장인 김원봉은 추도사를 신문에 게재하고 그를 추모하였다.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 하여 그것을 구실삼아 자기 민족의 지도자를 학살하는 이런 죄악은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민족국가의 부흥발전에 큰 상처를 남기는 일” 이라고 애통해 하였다.

김원봉은 8월 3일 거행된 여운형의 인민장 장례위원장을 맡아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여운형 장례식 행사가 김원봉이 남한에서 활동한 마지막 공개행사가 되었다. 김원봉은 8월 26일 트루먼 미국특사로 서울에 온 웨드마이어 중장 일행이 남한 정치지도자들을 면담하면서 그에게도 면담을 제의했지만, 신변위협과 더 이상 미국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 무렵 미군정 경찰은 김원봉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었으며, 8월 12일 새벽 4시에 그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쳐 수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원봉은 이미 피신하고 없었다.

경찰이 김원봉을 비롯하여 좌파계열 인사들을 구속하려는 이유는, 이들이 8월 15일을 기해 기념대회를 가장하여 폭동을 일으켜 일시에 공산당정권을 수립하려 한다는 혐의를 씌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쇠퇴 일로에 있던 남로당이 일시에 공산당 정권을 세우려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며 실제 이 음모와 관련하여 체포된 좌익 거물급 인물들은 대부분 석방되었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공산당정권 수립’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이 무렵 김원봉은 대단히 긴장된 상태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김원봉의 긴장된 나날을 시사해주는 기록이 있다.『시카고선』지의 마크게인이 1946년 10월 17일 “먼지 투성이의 도로와 불결한 골목을 지나 한 이층 건물”을 찾아갔을 때 약산은 “얼룩이 져 있는 흰 벽의 어떤 장식도 없는 넓은 이층 방”에서 허헌 등과 함께 회의 중이었다.

기자의 첫눈에 “준엄한 얼굴과 놀랍도록 튼튼한 목과 어깨를 가진” 모습의 약산은 자신을 ‘직업혁명가’로 소개하였다. 이날 면담에서 약산은 “자기의 은신처를 떠난 사람은 누구나 발각되는 대로 체포”하는, 미군정의 좌파진영에 대한 탄압정책을 지적하였다.

김원봉은 남쪽에서 거의 설 땅이 없어져 갔다. 1948년이 되면서 정국은 더욱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해방 3년차를 맞은 정국의 주요 흐름을 살펴본다.

1월 7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였다. 한 달 뒤에 단정 반대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거부하는 총파업과 시위가 발생하였다. 2월 10일에는 김구가 단정수립에 반대하여「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남북협상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와 김규식이 북측의 김일성ㆍ김두봉에게 남북요인 회담을 제의하는 한편 유엔한국위원단에 남북협상방안을 제시하였다. 김구의 성명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남한 인사들의 요인회담 제의에 북한 측은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였다. 미군정청과 남한 일부 우익단체들이 김구 일행의 북행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2월 19일 제2분과위원회는 하지 중장에게 허헌ㆍ김원봉 등이 자유롭게 회견할 수 있도록 이들의 신변보장을 요구하였다. 하지는 공보 제31호로서, 남한폭동 선동죄로 수색 중인 허헌에 대하여 28일까지 체포를 보류하는 한편 김원봉 등은 체포령을 내릴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

이승만과 한민당의 단독정부 수립 추진에 반대하며 제주4.3항쟁 발발

하지의 이와 같은 공개 성명에도 불구하고 좌익계열 지도자들은 여전히 위협을 느껴야 했고, 공개장소에 나서기 어렵게 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 등 분단세력이 단독정부 수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총선거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제주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제주 4ㆍ3항쟁이 발발하였다. 이후 계속된 4ㆍ3항쟁으로 무고한 3만 명에 이르는 도민이 희생되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원봉, 월북 결심 

김원봉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고, 신변에 대한 위협이 가중되면서 월북을 결심하고 4월 9일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3ㆍ8선을 넘나드는 것은 비교적 자유스러워서 월북에 별다른 장애는 없었던 것 같다. 미군정경찰의 감시만 피하면 되었다.

 

<4회로 이어집니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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