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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장투쟁사』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숨은 조력자, ‘체코군단’ Ⅱ

기사승인 2020.12.27  12: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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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전쟁 제2차 대승리, 청산리 전투

한편,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대패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 북간도 지역 내 독립군의 항일무장활동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대규모 독립군 토벌작전계획에 착수했다. 

그 첫 번째 정지작업으로 일본군은 두만강 건너 중국 영토 내에서 원활한 토벌작전 수행을 위해 10월 2일 중국 마적단 두목 창지앙하오(長江好)로 하여금 훈춘(琿春)의 일본영사관을 공격할 것을 사주한다. 이에 따라 400여 명의 마적단이 훈춘성을 공격하여 살인,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여 중국인 70여 명, 조선인 7명, 수명의 일본인을 살해했다. 그리고 비어 있던 일본공사관을 불태웠다. 이른바 훈춘사건(琿春事件)이다. 

일본군은 이 훈춘사건을 트집 잡아 중국 영내로 진입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여 대규모 독립군 토벌부대를 편성했다. 토벌부대를 세 방향에서 북간도로 이동시키는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착수했다. 바로 서남쪽 방향에서 북만주 파견대와 관동군 2천여 명, 시베리아 출병으로 파병된 블라디보스토크 동쪽 방향에서 포조군(제11사단과 제14사단) 4천여 명, 남쪽 방향에서 조선 주둔군 19사단(함경북도 나남)과 20사단(서울 용산 주둔) 1만여 명 등 총 1만 7천여 명이 독립군을 포위,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과 적극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主戰論)과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전론(避戰論)이 맞섰으나, 현실적으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독립군 병력을 두만강 상류인 중국 지린성 화롱현 청산리 일대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다. 
  

청산리 일대 독립군 부대들과 일본군과의 전투

이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 연합부대가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5박6일 동안 10여 차례 전투 끝에 일본군 토벌부대를 대파하였다. 

다시 말해, 중국 지린성 화롱현 청산리 지구에서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부, 한민회, 신민단 등 독립군 연합부대 1,400여 명이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에서 일본군 토벌부대 전체 중에서 많게는 3,300여 명을 사살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렇다면, 봉오동과 청산리(이하 봉·천)전투에서 비정규군, 소위 민병대라 할 수 있는 우리 독립군 연합부대가 당시 최첨단 장비로 중무장한 일본 상비사단 정예군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 

칼과 창, 활이 근간이 되는 전근대적인 근접전이 아닌, 최첨단 무기체계가 핵심이 되는 봉오동과 청산리의 근대전(近代戰) 전투에서 단순히 정신력만으로 일본 정예군과 싸워 승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신력만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은 봉·천 전투 발발 26년 전인 1894년 12월 5일(음력 11월 9일) 갑오년 동학농민전쟁 시 충남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증명되었다. 

칼과 창, 죽창, 낫, 괭이 등 전근대 무기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이 근대전의 최첨단 무기체계로 무장한 조선 정부군과 일본군 연합 토벌대에 맞서 싸웠다. 이것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 싸움이요, 바위에 계란치기와 같은 무모한 싸움이었다. 이는 상대와 대등한 싸움인 전투가 아니라, 토벌 연합부대에 의한 일방적인 동학농민군의 도륙전이라 할 수 있다. 소위 전투를 가장한 대량 학살이었다. 그만큼 우금티 전투는 근대전에서 무기체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봉·청대첩의 주요 요인--체코군단으로부터 첨단무기 획득 

여기서 봉·청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을 전쟁이론과 함께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전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적 요소가 중요하다는 '인간중심론적 전투수행론'과 군사기술적 요인이 결정적이라는 '기술결정론적 전투수행론'이 그것이다. 기술결정론적 전투수행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적 요소가 첨단무기 혹은 이로 구성된 첨단전력의 보유 여부라는 관점을 취한다. 

반면 인간중심론적 전투수행론은 전쟁이 불확실성과 마찰이 지배하는 영역이라는 클라우제비츠적 명제를 충실히 계승한다. 따라서 첨단무기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전쟁의 불확실성 요소를 극복할 수 있는 군사적 천재의 존재 여부, 즉 군사지휘관의 자질이나 군대의 훈련 여부를 중시한다.  

이에 근거한 필자의 판단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인간중심론적 전투수행론'과 '기술결정론적 전투수행론' 간의 절묘한 조합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인간중심론적 전투수행론'에서 최진동·최운산 장군,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 등은 한편으로 독립군 병사들에게 군인으로서 무한한 존경과 신뢰에 기초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전투 현장에서 전술적 지형의 정확한 파악과 숙지, 그리고 여러 유형의 실전 같은 교육훈련을 통해 독립군 개개 병사들에게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특히 독립군은 전투 현장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은폐·엄폐에 의한 매복과 기습전이라는 뛰어난 유격전 구사능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견인하는 한 축이었음을 봉·천 전투에서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승리의 또 다른 축이었던 '기술결정론적 전투수행론'으로 설명되는 첨단무기 보유는 당시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당시 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국제관계의 역학관계 속에서 러시아(소련)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다. 

이는 체코군단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9,000 킬로미터가 넘는 극동으로 오게 된 배경에는 체코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년~1918년)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과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상황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탄생과 체코의 식민지 지배,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체코군단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정원식 박사 약력 -

⦁중국 북경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
⦁중국 북경대학원 국제관계학(동아시아 해양안보 전공)박사
⦁재한국북경대학대학원교우회 초대회장
⦁약산 김원봉 장군 기념사업회 이사
⦁재향군인회 안보전략연구원 논문심사 위원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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