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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주의 봉오동전투 이야기』 독립전쟁의 제1회전

기사승인 2021.01.08  09: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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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의 전초전 국내진공작전을 본격적으로 개시"

 

장작림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최운산장군은 일제의 봉오동 독립군기지 소탕계획을 미리 입수하였다. 대통합을 이룬 ‘대한북로독군부’는 소극적으로 훈련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독립전쟁의 전초전 국내진공작전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1920년 초부터 수시로 소규모 편대를 구성하여 온성・회령・경원 등 두만강 유역의 여러 일본군 헌병대를 공격하였다. 사격술이 뛰어난 대한군무도독부의 군사들이 중심이 된 국내습격전은 일본헌병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대해 강덕상과 반병률은 “만주지역의 항일독립군단체들은 3·1운동 이후 축적된 무장력을 바탕으로 1920년에 들어와서 활발한 국내진공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상해의 『독립신문』은 1920년 3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의 기습대와 전령대가 협동하야 도강하여 벌인 소전투가 총 32회에 달했고, 일본 순경대정탐을 격살하고 일본관서와 순사파출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관헌은 북간도의 독립군단체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무력침격을 감행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는 최명록부대(군무도독부)가 1920년 3월부터 6월에 걸쳐 무려 36회에 걸쳐 국경의 종성군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했다. 

대한군무도독부가 적극적으로 국내진격전을 펼치자 온성군을 비롯한 국경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이 커져갔다. 

당시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봉오동을 중심으로 재배치되고 독립군의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었기에 봉오동 독립군의 세력이 더 확산되기 전에 빨리 토벌해야 한다는 밀정보고서가 늘어났고 독립군에 대한 일본군의 위기의식이 심화되었다. 

두만강 유역 국경수비대의 인원을 늘리는 등 대응의 수위를 높이며 독립군을 경계하던 일본군은 만주지방의 독립군에 대한 비상경계에 돌입하고 봉오동 독립군기지를 파괴하기로 했다. 일제 조선군사령부는 4월 봉오동 근거지를 일소한 다음 다시는 근거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노령과 간도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중요 지점에는 군대 및 군경보위단 등을 증가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중국을 압박했다. 

그러나 서간도와 달리 북간도에서 중국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본군이 독립군 근거지 소탕을 위한 단독행동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일본군의 움직임 등 비밀정보를 관리하던 최운산장군은 일본군이 독립군의 본거지 봉오동을 급습할 것이라는 첩보를 받았다. 일제와의 대규모 독립전쟁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간파한 최운산 장군은 5월 중순부터 전쟁에 대비하여 마을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켰다. 

‘대한북로독군부’를 전시체제로 편성해 연대별로 각 산 위에 진지를 구축했다. 적군의 진입로가 잘 보이는 곳에 참호를 파고 매복부대와 기관총을 배치했다. 전쟁 물자를 보급하는 특별부대를 편성하고 부상병을 신속하게 치료할 수 있도록 의무부대도 후방에 배치했다. 또한 허수아비에 군복을 입혀 산위에 세워 독립군의 숫자가 많아 보이도록 하였다. 

최운산 장군은 이렇게 자신의 소유지이며 천혜의 요새라고 불렸던 봉오동의 지형적 특색을 이용하여 봉오동전투가 일어나기 보름 전에 이미 모든 전쟁 준비를 마치고 일본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1920년의 봉오동전투 후 임시정부의 군무부 발표와 일본군의 봉오동전투상보가 기록한 당시 전투의 경과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20년 6월 4일의 독립군의 전진부대가 두만강변 강양동의 국경수비대를 습격한 후 후퇴했다. 
6월 4일 강양동 습격전과 삼둔자교전(군무부 발표와 전투상보 동일)  
6월 6일 오후 10시 삼둔자에서 교전 (전투상보에는 오후 9시30경 삼둔자 교전) 
하마탕에 결집하여 출발 준비를 하던 일본군은 도강 위치를 바꾸어 밤새 안산으로 진격  
6월 7일 새벽 3시30분 안산부근 300미터 교전 (전투상보 3시45분 안산북방 2,000미터 교전)
6일 7일 오전 6시30분 고려령 서편 1,500미터 지점(전투상보에는 오전6시 표고334고지 교전)
6월 7일 오후 1시 경 봉오동 상촌 상봉오동에서 시작된 상봉오동전투가 있었다. 

1920년 6월 7일 새벽 6시 30분경 고려령 서편 1,500m고지에 도달해서 봉오동을 향해 전위부대를 내보냈다. 그러나 매복해서 기다리던 독립군 전위대가 일본군 전위부대를 전멸시키고 재빠르게 본대로 복귀했다. 

전위부대원들을 모두 잃은 일본군은 잠시 퇴각했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해 고려령을 넘었고 11시 30분경 일본군 보병부대 본진이 봉오동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산 위에 매복한 독립군들은 잠복부동한 채로 그들이 산으로 모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당시 어린애였지만 담대한 성격의 최운산 장군의 큰딸 청옥은 일본군을 몰래 숨어서 보았다. 견장을 붙이고 긴 장화를 신은 일본군들이 번쩍거리는 나팔을 요란하게 불며 마을을 지나 산으로 행진해 올라갔다고 한다. 

일본군은 비어있는 최운산 장군의 집에서 마굿간에 묶여있던 말 몇 마리를 발견했다. 한 마리는 일본군 대장이 올라타고 나머지는 대포와 기관총 등 무거운 무기수레를 끌고 산을 넘느라 지친 일본군 말들과 바꿔 무기수레를 지워 산으로 끌고 갔다.

산으로 올라온 일본군의 후미가 매복지점을 지날 무렵 봉초봉 독립수 아래에 서있던 사령관 최진동 장군이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총을 발사했고 동시에 맹렬한 사격이 시작되었다. 

완전 포위된 일본군은 혼란에 빠졌다. 더구나 마굿간에서 탈취해간 말들이 총소리에 높이 뛰어올랐다. 말을 뺏아 탔던 일본군 장교는 말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 기관총과 대포가 실린 수레를 끌고 간 말은 무기를 실은 채 거꾸로 마을을 향해 내달렸다. 본격적인 총격전이 계속 되었다.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전투가 본격화될 무렵 ‘대한북로독군부’ 사령부의 퇴각 명령이 없었음에도 홍범도 장군이 자신의 휘하 부대원들에게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살아남아 조국의 독립을 보자.’며 스스로를 정식 군인이 아닌 빨치산이라 칭하고 부하들을 데리고 산을 올라 뒤로 퇴각했다. 다음은 그때 홍범도 부대원이었던 이종학의 글이다.

“그날 아침.... 望塔은 봉오골 가은産 맨 마지막 3골 어구 가운데 峰에 있었다. 일본 군대는 일시에 자우방면에서 침입하여서 望坮를 향하고 突入하여 우리 望坮있는 데다가 사격을 시작하였다. 우리도 마주 사격을 始作하였다. 잠시 후에 洪범도 大장은 사격을 그치고 북쪽을 향하여 차츰 높은 봉으로 오르라는 命令을 전하였다.... (중략) ....  홍범도장군은 ”우리는 죽지 아니하고 독립을 해야 된다.”고.... 우리는 정식 군대가 아니고 빨치산이다. 그러니 전략과 전술이 정식 군대와 빨치산이 판이한 것이다.”라고 흥분에 겨우신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그런데 그들과 함께 있던 신민단 대원들은 본부의 퇴각 명령이 없었으니 홍범도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며 그 자리를 사수했다. 그러나 숫적 열세에 밀린 그들은 일본군의 집중 공격에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삼면을 포위하고 승세를 굳혀가던 중에 한쪽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아군이 치명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봉초봉에서 이 사태를 파악한 최운산 장군이 매복을 풀고 부하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와 전투를 이어갔다. 전투에서 매복전과 백병전은 어려움을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었고 자칫 아군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 주먹만 한 우박이 떨어지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전열을 정비한 최운산 장군이 위기를 넘겨 승세를 굳힐 수 있었다.

자연 조건이 나쁠 때는 그곳의 지리에 밝은 지역군대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비가 오는 중에 일본군 후속부대가 도착했고 다른 방향에서 산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군 후속부대는 독립군을 속이기 위해 군모에 두른 붉은 띠를 떼어내고 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피아를 구분하지 못한 일본군들은 멀리서 들어오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일본군의 사상자가 대규모로 늘어났다. 전투 후 일본군의 보고서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지만 당시 봉오동에서는 일본군끼리의 치열한 사격전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수백에 이른 이유 중 하나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일본군은 패배를 인정하고 두만강을 건너 유원진으로 퇴각하였다. 

당시 독립신문은 전투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일본군의 전사자는 120여 명, 독립군 측의 사망은 1명, 부상자 2명이었다.”라고 독립군의 승전보를 전했으나 당시 일본군은 사망자만 500여 명이었고 중상자도 수백에 이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아군인 독립군 사망자도 수십 명에 달하였다. 

전투 후 일본군의 ‘전투상보’는 자신들이 상대한 독립군에 “적은 전부 러시아식 소총을 갖고 탄약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도 상당히 훈련되어 있다. 거리 측량이 불확실한 7~8백미터 거리에서도 사격을 하며 지형을 이용해서 방어할 때는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또 용감하게 싸운다.”....(중략).... “금회 다음의 사실을 확인하였다. 대안불령선인단은 정식의 군복을 사용하고 그 임명 등에 사령을 쓰며 예식을 제정하고 있는 등 전적으로 통일된 군대조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나측은 이를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제 경고를 줄 필요가 있다.” 독립군의 전투력에 놀라고 감탄하면서 독립군의 활동을 보장하는 중국 측에 대한 불만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개별 전투상황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대한북로독군부’의 지휘부나 전체 운용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자신들이 누구와 싸웠는지 그 부대의 지휘관은 누구인지 등은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북로독군부(전 명칭 대한군무도독부) 제1, 제2중대(수령 최명록), 대한독립 신민단(김규면), 독립의군(홍범도)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휘관은 불명”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 정규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는 오랜 기간 동안 정치적 경제적 준비를 감당한 최운산 형제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모든 독립군들의 목숨을 건 의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독립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운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민족사적 쾌거 봉오동전투는 국내외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했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시나브로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린 이 승리는 당시 “독립전쟁 제1회전”으로 회자되었다. 

전투 후 평가회의를 하면서 총사령관인 최진동 본진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퇴각하여 그 자리에 남아있던 신민단 대원들이 전멸당하고 아군을 위기에 빠뜨린 홍범도의 결정에 대해 크게 문책했다. 그런데 「독립군 내홍의 건」이라는 일제보고서와 “... 6월 4일부터 7일 사이에 벌어진 봉오동전투가 끝난 후 홍범도부대가 일제에 아무런 응전을 하지 않은 채 급속히 퇴각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본 대한북로독군부의 최명록 부장이 홍범도를 비판했다....”는 논문이 있음에도 몇몇 학자들이 이 일이 마치 최진동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지휘권 다툼인 것처럼 설명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봉오동에서 철저하게 훈련양성 되고 전투경험도 많았던 ‘대한군무도독부’의 정예 대원들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이 기관총과 대포 등 현대식 무기로 완전무장 하였기에 정규 일본군에게 밀리지 않는 전투력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반병률과 강덕상은 “통합된 후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간도국민회군은 최진동 장군의 사재(私財)에 많은 힘을 입었다.... 최진동장군은 국민회 산하의 무장부대의 건설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고 안무의 국민회군이 정비된 독립군이였지만 정규군인 일군과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670명의 강력하고 완전무장한 최진동장군의 군무도독부와의 통합은 1,200여명에 이르는 단합된 무장력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립군이 결성됨으로하여 봉오동전투의 승리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중요한 일정을 사진으로 남겨놓는 당시의 관행으로도 아주 중요하고 특별했던 조치가 있었다. 최운산 장군은 전문사진사로 하여금 봉오동전쟁의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도록 한 것이다. 종군기자라 할 수 있는 사진사가 목숨을 걸고 승전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임시정부로 보내어 승전 소식을 모든 국민과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봉오동전쟁 전황 촬영 사진 3매, 상해로 보낼 예정, 
     별지 전쟁 촬영 사진3매는 제2 남지방의 박준재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 바람” 

그러나 봉오동전투의 승전보를 신문을 통해 세계에 알리는 석판작업을 한 후 ‘대한북로독군부’의 소중한 역사적인 기록이므로 도로 돌려달라고 당부하며 상해 임시정부로 보낸 3장의 봉오동전투 현장 촬영사진은 어디선가 유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단지 행정을 맡았던 국민회군이 빼앗긴 문서기록으로만 남아있어 안타깝다. 봉오동전투에 관한 신문기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기록은 봉오동전쟁 당시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한 김성녀 여사는 당시 아군의 사상자도 많았다고 증언하였다. 사망자만 수십 명에 이르렀고 부상자도 수십 명이었다. 의무부대는 총상치료에 최선을 다했지만 부상자에 비해 의사가 부족해 애를 태웠다. ‘대한북로독군부’ 지휘부는 시급을 요하는 총상치료를 위해 용정 제창병원에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최운산 장군은 부대원 전원에게 잔치를 열어 격려하였고 부대별로 승전기념 촬영을 하게 했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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