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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문의 『역사 돋보기』 - 붉은빛이 영롱한 파사석탑

기사승인 2023.01.13  14: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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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대구종친회 김성문 회장

 

지난 2022년, 김해 가야국 수로왕비릉을 다녀왔다. 경내 능 쪽으로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면 오른 파사각 안에는 파사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허왕후가 바다를 건너 가야국으로 올 때 파도를 잠재워 순탄하게 오기 위해 배에 싣고 온 탑이다. 파사석탑을 보면 볼수록 궁금증이 더해진다.

허왕후는 서기 48년 5월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가야국 땅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바다 신의 노여움으로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이때 허왕후의 아버지가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하였다. 석탑을 실으니 배는 무게 중심을 잡고 바다를 편하게 건널 수 있었다. 바다의 거센 파도를 진정시켰다고 진풍탑이라고도 한다.

타밀(인도) 사회에서는 자녀들이 부모 곁을 떠나 멀리 갈 때는 자녀들의 평안과 신의 가호를 빈다. 그리고 악을 물리치기 위해 몸에 지니는 파사돌을 주어 부적과 같이 생각하게 했다. 파사석은 파사돌로 타밀어로도 똑같이 파사돌(paasadol)이라 한다. 파사돌의 가루를 ‘빠사’라고도 하며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 부적처럼 얼굴의 두 눈썹 사이에 동그랗게 바른다.

파사석탑(婆娑石塔)의 ‘파사’는 범어(梵語)로 ‘바사’라고 한다. 범어는 인도 아리안어 계통으로 고대 인도의 표준 문장어이다. 파(婆)는 범어로 바(bhā)이고 그 뜻은 유(有)이다. 사(娑)는 범어로 사(sa)이고 진실한 도리(諦)를 의미한다. 즉, 파사를 한자로 풀면 ‘진리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파사석탑에 관한 기록을 보면,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 조에 있다.

  “금관(金官) 호계사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동한 건무  24년 갑신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고적 조에도 파사석탑이 등장한다.

  “파사석탑은 호계변(虎溪邊)에 있고, 모두 5층이다. 돌 빛이 붉게 아롱졌고, 질은 좋으면서 무르며 조각한 것이 매우 기이하다. 허왕후가 서역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

  가야국에 도착한 허왕후는 파사석탑을 어딘가에 보관한 것으로 보인다. 호계사는 서기 452년 가야국 제8대 질지왕이 창건했으므로 호계사를 창건한 후, 호계변에 있는 파사석탑을 호계사로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

  호계사에 있던 파사석탑은 조선 고종 때 호계사(虎溪寺)가 폐사되자, 김해 부사로 있던 정현석(鄭顯奭)이 서기 1873년 수로왕비릉 곁으로 옮겼다.

  정현석은 "이 탑은 허황옥 공주가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수로왕비릉에 둬야 한다."며 파사석탑을 현재의 수로왕비릉으로 옮겼다.

30여 년 전만 해도 보호각 없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런데 1993년 5월에 파사석탑을 둘러싼 보호각인 파사각을 4각 지붕으로 건립했다. 아담한 파사석이 더욱 영롱해 보인다. 파사석탑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서기 1996년에야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파사석탑이 호계변에 있을 때는 5층이었는데, 수로왕비릉으로 와서는 6층이 되었다. 원인은 알 수 없다. 허왕후가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올 때 5층 외에도 여분의 파사석을 더 싣고 온 듯하다. 밀양시 삼랑진 부은사에 가면 맷돌 모양의 파사석이 있다. 부은사는 수로왕과 허왕후가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해서 창건한 절로 전해지고 있다.

허명철 박사는 “파사석은 인도 아유타국 지방에서만 나오는 돌로 확인했다. 그리고 탑을 분해하여 원형대로 석고를 사용하여 복원했다. 놀랍게도 그 모양이 역삼각형으로 아래층이 좁고 위로 갈수록 넓고 큰 돌로 쌓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형태의 탑은 인도의 석굴 사원인 아잔타나 엘로라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현재의 파사석탑은 사각형의 받침돌 상면에 탑을 올려 놓기 위한 높은 돌이 있고, 그 위에 6개의 파사석이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파손과 마멸이 심하지만 각 파사석의 측면과 하면에서는 연화문 등의 조각이 확인 된다.

 파사석탑은 서기 2019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동해서 ‘가야본성 칼劒과 현絃’에 전시까지 했다. 이때 파사석탑이 있는 구역을 신화라 했다. 파사석탑은 신화가 아니고 역사 그 자체이다. 2,0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도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국가문화재로 승격되면 좋겠다. 파사석탑은 가야국의 역사와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논할 때 중요한 문화재라는 것은 증명이나 설명하지 않아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파사각을 떠나려니 파사석탑에서 약 2,000년 전의 모습으로 붉은빛이 영롱하게 빛난다.

 

차보람 기자 carboram@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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