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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문의 『역사 돋보기』 - 역사가 증명한 수로왕비릉

기사승인 2023.01.26  11: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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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대구종친회 김성문 회장

 

수로왕비 허황옥 공주는 전설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허왕후릉도 가짜라고 한다. 허왕후릉은 공식 명칭이 ‘김해 수로왕비릉’이다. 사적(史蹟)으로 지정됐다. 왕비릉에 직접 가 보았다. 아늑하다. 오랜 세월 속에 전해오는 동안 기록이 미비하다 보니,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하기도 한다.

허왕후는 수로왕보다 10년 일찍 세상을 떠나 그런지 수로왕릉보다는 위쪽이고 북쪽에 있다. 왕비릉의 외부 모습은 흙으로 둥글게 만든 무덤이다. 능의 밑 둘레에는 특별한 시설은 없다. 능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둘러 능을 보호하고 있다. 전면에는 길게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왕비릉의 중앙에는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을 놓았다. 아울러 커다란 능비가 세워져 있다. 능비는 1647년에 세웠고, 글자는‘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이라는 글자가 두 줄 세로로 새겨져 있다.

허왕후는 서기 48년 음력 5월에 출발하여 그해 음력 7월 27일 먼바다를 항해해 가야 땅에 와서 수로왕과 혼인했다. 혼인 사실은『삼국유사』「가락국기」 조에 도착과 혼인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출발한 곳은 인도로 보는 관점과 중국으로 보는 두 관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유타국 공주라고만 했다.

아유타국은 현재 인도의 아요디아에 있었던 고대 국가였다. 아요디아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갠지스강의 지류인 가가라(Ghaghara)강 연변에 있다. 아유타국은 기원전 70년경에 인도 칸바 왕조에 의해 점령당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어서 기원전, 후경 쿠샨(월지족) 세력에 의해 칸바 왕조가 몰락하자 아유타국 지배층은 아유타국을 탈출하여 어디론가 이주했을 것이다.

아유타국 지배층은 인도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했다는 설이 있다. 그 후 허왕후가 가야 땅으로 오기 위해 갠지스강에 배를 띄워 남동 계절풍을 타고 바다로 이동하여 왔다는 견해이다.

한편, 아유타국 지배층은 아유타국과 이웃하는 아시아 서남부에 있는 미얀마와 중국 윈난성을 거쳐 쓰촨성 안악현에 정착한 후 허왕후가 중국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다.

인도에서 왔든, 중국에서 왔든 실존 인물임은 틀림없다. 허왕후가 인도 아유타국 출신이라는 증거는 김해 수로왕릉 납릉 정문 좌우에 새겨진 쌍어 무늬와 중앙에 흰색으로 그려진 파사석탑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손의 DNA 분석으로도 알 수 있다.

인도에서 쌍어 무늬는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인도 아요디아의 상징적인 표지이다. 고대 인도어인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가락’이라 한다.

좌)수로왕릉 안향각의 쌍어, 우)인도 아요디아 힌두교 사원의 쌍어 참조=김병모의 가락국의 상징은 쌍어문

약 2,000년 전 인도 아요디아는 고대 코살라왕국 수도로써 힌두교를 부흥시킨 라마왕의 탄생지로 두 마리 물고기를 숭배하던 나라였다. 현재 인도 아요디아 사원에 가면 쌍어 무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금관가야 수로왕릉 정문이나 아유타국의 왕자 장유화상이 창건했다는 김해 신어산의 은하사에서도 쌍어 문양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1792년까지 납릉 정문이 존재하지 않아서 쌍어 무늬가 없었다고 한다. 납릉 정문이 건축되면서 그려 넣었다고 하나, 서기 199년 수로왕이 붕어한 후 수로왕 사당도 건립했다. 왕릉을 관리하는 재실도 있었다. 수로왕 사당이나 재실 정문에 있던 쌍어 무늬를 납릉 정문을 건축하면서 기존의 쌍어 무늬를 그대로 옮겨 그렸다고 본다.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가야 땅으로 올 때 파도를 이기기 위해 배에 싣고 온 돌이다. 이 돌을 두고 우리나라 어디엔가 생산된다는 견해가 있었다. 그래서 2019년 국립김해박물관과 고려대학교 산학협력단에서 돌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어디에도 생산되지 않고 인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돌로 밝혔다.

허왕후가 인도 계통의 여성이라는 근거를 밝힌 연구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김종일 교수는 서기 2004년 김해 예안리 고분 가야 왕족 유골 4구 가운데 1구에서 인도의 여성 DNA를 발견하였다고 발표했다. 인간의 DNA 중 여성 쪽으로만 유전되는 DNA가 있다. 그러므로 허왕후는 인도 계통의 여성임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에서 온 근거로 김병모 박사는 능비에 기록한 ‘보주태후’에서 보주는 중국 쓰촨성 안악현의 옛날 지명이므로 허왕후가 보주에서 가야 땅으로 왔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나도 김병모 박사의 견해에 동의한다. 역사적인 유추에서 수로왕과 하왕후는 사전 혼인 예약이 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수로왕은 신하들을 시켜 망산도로 마중을 나가게 했다.

허왕후가 가지고 온 혼수품은 모두 중국 제품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정착한 후 가야 땅으로 왔다고 본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기록된 혼수품을 보면, 수를 놓은 비단과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 필로 된 비단, 겉에 입는 옷과 저고리, 금과 은, 구슬과 옥, 구슬로 만든 패물 등이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혼수품 중 옥은 신석기 시대부터 주로 몸치장용이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권력자들의 권위와 신성함을 높여 주는 상징물이었다. 철기 시대 때 구슬은 금이나 비단보다 귀한 보석으로 여겼다. 구슬로 만든 패물을 많이 가지고 왔다니 허왕후의 친정 세력도 가히 짐작해 볼 만하다.

능에 딸린 부속 건물로는 숭보재,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이 마련되어 있어 보기에도 아름답고 웅장하다. 이 능은 평지에 있는 수로왕릉과는 달리 구릉에 있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확 트인다. 묘지 내부의 구조는 알 수 없으나 널무덤, 또는 돌방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왕비릉도 임진왜란 때 도굴의 피해를 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많은 유물이 도굴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오래전 가야 땅에 와서 열 왕자와 두 공주를 출산한 허왕후를 전설의 인물이라니 타당치 않다. 왕비릉에서 일몰이 가까워 짐을 보면서 능 아래로 발길을 옮긴다. 

 

 

차보람 기자 carboram@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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